늘어서 있던 약 병들과 과자 봉지를 치우고 나니 흰 벽이 드러났다. 깔끔했던 벽에 어느 새 커피가 여러 방울 튀어 시간이 흐른 티가 난다. 이사올 때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었던 커피 테이블은 물건을 툭 올려두기 쉬워 복잡하고 지저분한 상태가 되곤한다. 다시 설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퇴근 후 마음먹고 정리를 했다.
빈 벽이 허전해서 여행 사진을 두장 붙였다.
런던 여행에서 나와 준이가 함께 찍은 사진, 남편 혼자 나온 사진. 두개를 종이 테이프로 붙였다.
작년 런던 여행가기 전에 후배가 일회용 흑백사진 카메라를 선물로 주었다. 요즘은 여행지에서 흑백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라고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이 너무 고마웠고 새로운 문물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카메라는 여행지에서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손에 쥐고 다니는 휴대폰 사진은 실시간으로 수천장을 찍으면서도 카메라를 꺼내서 셔터를 누르는 것은 번거로웠다.
오랜만에 찍어본 필름 카메라는 바로 결과를 볼수없어 재미가 없기도 했다. 어차피 이상하게 찍히지 않았겠냐며 웃었다.
여행 막바지에 필름이 여러장 남아있는 것을 확인했다. 집에 돌아가면 바로 인쇄하고 싶어 남은 필름을 소진하기 위해 이곳 저곳에서 막 찍었다.
여행지에서 돌아와 짐 정리를 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필름을 인화하기 위해 사진관에 갔다. 일회용 카메라를 통째로 맡기면서 은근한 기대감이 들었다. 남편도 나도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했다. 완성 날짜가 적힌 용지를 받아 지갑에 넣는 행위가 새삼스럽게 즐거웠다.
사진이 완성되었다는 문자를 받은 날 기다렸다는 듯 퇴근 하자마자 사진관에 갔다.
흑백 사진은 생각보다 너무 멋있어서 홀대한 것이 미안했다. 흐린 실루엣이 더 감미로웠다. 미흡한 우리들의 촬영 솜씨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건물들은 작품사진 속 주인공처럼 고풍스럽게 보였다.
서랍속에 넣어두기 아까워 현상한 사진을 받은 날 안방 보일러 조절기 위 삭막한 공간에 붙인 두장의 사진이 아직도 그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제 커피 테이블을 정리하고 나서 빈 흰 공간에 붙인 두장까지 우리 집에는 런던에서 찍은 흑백사진이 총 4장 붙어있다.
출장간 남편과 영상통화를 하며 새로 붙인 사진을 보여주었다. 앞으로는 여행을 갈때 꼭 흑백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사진을 찍어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