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셋 Nov 22. 2019

'함무라비 법전'으로 타인의 마음에 대응해도 될까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정당방위'

 

 난 어렸을 때는 정말 소심했다. 워낙 내향적인데 소심하기까지 해서 자기주장 하나 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경우가 허다했었다.


 얼마나 소심했냐면, 대학에 들어와서 20살이 되자마자 첫 소개팅을 한 적이 있었는데 상대가 나에게 이런 소리를 했었다. " 왜 사람 눈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으세요? 혹시 제가 그렇게까지 마음에 드시지 않는 건 가요? "라고.  


 너무 긴장돼서 상대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그 자리 자체가 너무 힘들어서 상대 눈은커녕 말하는 것조차 어려웠었다.


 그런데 사람이 참 웃긴 게, 대학에 오고 동아리 활동을 하다 보니 성격이 꽤나 바뀐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소심하지만, 뭔가 부조리하거나 상대의 말이 타당하지 않으면 호전적(好戰的)으로 상대의 말에 논리적으로 반박하려고 하거나 똑같이 대하려고 하게 바뀌었다.


  사실, 이게 바뀐 것인지 숨겨져 있던 본능이 튀어나온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함무라비 법전에 대해서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은 있을 것이다. 고등학생 때 잠깐 배운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흘려 들었었는데, 대학 교양 강의로 다시 접하게 되었을 때는 이 법에 참 매료되었었다.


 원래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처음에는 함무라비 법이 정말 공평한 법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좋은가. 상대의 눈을 다치게 했으면 똑같이 만들어 주고, 상대에게 상처를 내면 똑같이 상처를 준다. 정말 타인에게 준대로 돌려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배우고 보니 이게 공평하기만  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을 바꾸게 한 것 중에 가장 감명 깊었던 내용은 이것이었다.



  우리나라 형법 제337조에서는 ' 강도가 사람을 상해하거나 상해에 이르게 된 때에는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즉, 강도를 하려다가 사람을 다치게 하면 형량이 무기 또는 7년 이상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형법 제250조에서는 '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라고 규정이 되어 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상해를 입히는 것과 살해를 하는 것은 그 죄질의 크기 차이가 크다. 사람을 죽여버리는 것과 상해만 입히는 것은 목숨을 뺐느냐 아니냐에 따라 달려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살인죄에 사형의 죄가 있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강도상해에서 죄의 하한, 즉 죄의 최하 형량 시작점이 7년부터 인 것에 반해 살인죄에서는 5년부터 시작한다.


 즉, 살인을 했는데 5년을 받고 상해를 입혔는데 7년을 받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법전이 정해졌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다. 강도상해의 경우에는 살인죄에 비해서 죄를 범하는 의도가 더 나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살인은 절대 옹호될 수 없지만, 가령 오랜 학대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례가 살인죄가 강도상해에 비해 많다. 즉, 살인은 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다양하지만 상대적으로 강도상해의 경우에는 그 비율이 적다.


 그럼에도 살인죄는 생명 자체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사형이 들어가게 되지만, 형량이 5년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입법자가 의도했는지에 대해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굉장히 타당한 얘기이다.


 결론적으로, 그래서 함무라비 법전은 타당하고 정의로운 법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실수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발생한 결과에 대해서 그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정의롭지 않는 결과를 낳게 될 수 있다.


눈을 가리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


  위의 사진이 흔히 정의의 여신상을 상상하면 보이는 여신상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의의 여신상은 이와는 좀 다르다.


눈을 가리지 않은 정의의 여신상


 우리 대법원의 중앙 현관의 여신상은 눈을 뜨고 왼손에는 저울을, 오른손에는 두꺼운 책을 들고 있다.


혹자는 이 정의의 여신상이 피고인의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 사법부의 면을 드러내고 있다며 비웃기도 한다.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으니 상대의 신분이 상대의 사회적 위치를 보고 그를 감안해서 재판을 한다며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눈을 가린다고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상대의 환경, 성장배경 등을 보고 사정을 헤아려서 하는 것이 정말 '정의롭게' 재판하려 한다면 더 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무라비 법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일 것이다. 똑같이 응대한다고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정당방위의 개념도 들어와 있다.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라면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를 저질렀음에도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처벌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 조항이 적용되는 것이 까다롭기는 하지만, 함무라비 법과 같은 것만 있었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조항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겉으로 상처를 내는 것이면 함무라비 법이 옳지 않지만, 마음에 있어서 적용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은가. 법이 적용되는 부분 말고 도덕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경우에는 다양한 이유 같은 것은 적다. 


 말을 못되게 하고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사람들은, 그냥 나빠서 혹은 열등감에 그것도 아니면 상대가 상처 받는 모습을 보고 우월감을 느껴서 때로는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렇게 까지 말하지 않아도 됨에도 말을 하고, 상대의 상처를 후벼 파고 상대를 무시하고 상대를 업신여기고 하나의 실수로 모멸감까지 느끼게 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대부분 저런 이유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함무라비 법전을 사용해도 되지 않은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에 따라서 똑같이 대하거나 되로 받았으니 말로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어렸을 때는 참 호전적으로 맞받아 치고는 했었다. 상대가 논리적으로 말하지 않거나, 혹은 상대를 괴롭히려고 말할 때는 대놓고 뭐라고 받아치곤 했다.



 그런데, 나이를 들어가다 보니  성질대로 받아치며 살기에는 녹록지 않은 경우가 많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때로는 사회적 위치 때문에, 때로는 상대가 나의 선배이거나 직장상사거나 어른이어서, 때로는 그 사람이 받은 상처 때문에 오히려 나쁘게 말함을 알아서, 때로는 말조차 통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함무라비 법전을 사용하기가 참 어려울 때가 있다.


 더군다나, 인생을 살면서 맞대응하면 상황이 나에게  좋지 않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인생을 살면서 적은 최대한 적게 만드는 것이 좋다. 상대가 명백하게 부정의 하더라도 이야기가 돌고 돌다 보면 내가 희대의 나쁜 놈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더럽고 아니 꼬아도 그저 참거나 정당방위 수준으로 대응해야 하는 대다수이다.


 하지만, 너무 억울해할 필요도 없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함무라비 법전이 사라진 데에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듯이. 어차피 나쁜 놈은 대다수가 말을   뿐이지 나쁜 놈인  안다. 자기만 모를 뿐이지.


 어차피 자기 주변에 그런 형식적인 인간관계만 남는 사람에게 구태여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 직접적이지는 않을지라도 간접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나에게 더 이로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함무라비 법전을 쓰면  된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있어서는 함무라비 법전으로 대응해야  정도인 인간이거나, 그럴  있는 상황이면 함무라비 법전을 사용해도 된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정당방위 수준으로 하거나 속으로 퉤퉤 한 번 침이나 뱉어주고 무시하고 마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이롭다는 것을 알게  것이다.  


 남의 눈조차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소심했던 시기에서 호전적인 시기를 지나서, 이 방법이 더 나은  때가 많다는 것을 알아가는 중이다.

작가의 이전글 " 내 인생에 호들갑 좀 떨지 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