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월드의 여성 캐릭터가 매력이 없는 이유
드라마계의 흥행보장 수표인 김은숙 작가의 <더 킹 : 영원의 군주>(이하 <더 킹>)이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보이며 종영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홈쇼핑을 방불케 하는 과한 PPL, 복잡한 세계관에 비해 허술하고 불친절한 연출 등 다양한 문제점이 지적됐지만, 김은숙 작가가 그려내는 여성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백마 탄 왕자가 구해주는 신데렐라 스토리. 그의 드라마가 가지는 전형성이다. 돈도 많고 능력도 있으며 잘생기기까지 한 남자 주인공이 평범한 여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져 신데렐라로 만든다. 그러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남성 캐릭터의 극대화된 능력과 이 능력을 돋보이게 하는 여성 캐릭터의 위험이다. <도깨비>의 지은탁(김고은 분)은 김신(공유 분)의 집에 함께 살기 위해 고아가 됐고, 이모에게 학대를 당했다. <태양의 후예>의 강모연(송혜교 분)은 유시진(송중기 분)에게 구해지기 위해 매번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한다. <상속자들>, <시크릿가든>, <파리의 연인> 등 그의 다른 작품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백마 탄 왕자를 위해 희생되는 여성 캐릭터
<더 킹>도 마찬가지다. 우선, 이곤(이민호 분)은 입헌군주제인 대한제국의 황제다. 이부터가 무소불위의 권력인데, 드라마 속 이곤은 입헌군주가 아닌 전제군주제의 황제라고 착각할 정도의 권력을 뽐낸다. 황족 죽음에 대한 수사권을 가지고 있고 전쟁에 직접 참전하기도 하며, 600경의 가치를 가진 희토류 매장산의 주인이다. 그가 말버릇처럼 외치는 "자넨 참수야"라는 대사는 유머를 위한 농담인 줄만 알았다. 아무리 역모에 가담했다지만 정말 그는 아무런 절차 없이 시민을 죽인다.
이곤은 대한민국이라는 낯선 환경에서도 금방 적응하며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침착하게 특급 호텔의 방을 잡아 안락한 생활을 이어 나간다. 이러한 이곤의 옆에는 조력자들이 많다. 정태을(김고은 분) 외에도 태을의 아버지와 후배 등 태을의 주변 인물들이 우호적인 태도로 그를 도운다. 대한제국에서의 태을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대한제국에서 태을에게 우호적인 인물은 이곤이 유일하다. 이곤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태을을 경계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태을이 이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낯선 환경 속에서 이곤의 도움은 더 극적으로 느껴진다. 극적인 도움을 위해 태을은 위험에 처해야 한다. 낯선 곳에서 돈이 부족하고, 목숨을 위협받는다. 몇 천 원 표값이 부족해 발이 묶인 태을과 화폐 가치가 다름에도 문제없는 이곤의 보석 단추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설상가상으로, 이곤이 태을을 구하러 올 때는 수많은 부하들, 웅장한 음악, 멋진 연출과 함께이다. 곤경에 처해 무력하게 도움을 기다리는 캐릭터와 극적인 타이밍에 온갖 능력을 발휘해 상대를 구하는 캐릭터. 둘 중 누가 더 매력적인 캐릭터인지는 분명하다.
여주는 그저 거들뿐
'주인공'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연극, 영화, 소설 따위에서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 또는 '어떤 일에서 중심이 되거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주인공이 이런 의미라면, <더 킹>에서 태을은 주인공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는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부에서 보조적인 역할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 사건 해결의 핵심은 이림(이정진 분)과 시공간의 이동이다. 평행세계와 시간의 축 사이를 이동해 이림을 막아야 하는 것이 사건의 본질이다. 하지만 이 이동을 위해 필요한 만파식적은 이곤과 이림만이 가지고 있다. 태을은 이 사건의 희생자가 될 뿐, 중심으로 들어와 주체적으로 맞설 기회조차 없다. 결국,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남자 주인공인 이곤뿐이다.
태을은 지금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애초부터 이 드라마는 '이성적인 이과 남성과 감성적인 문과 여성'이라는 성격을 설정했다. 판타지 같은 평행세계 이야기를 별 의심 없이 믿어버리는 것이 이과적인 성격이라는 설정부터가 납득하기 힘든데, 왜 문과적인 감성이 무지로 이어지는지는 더 이해하기 힘들다. 항상 이곤은 알고 정태을은 모른다. 모르니 그저 이곤이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이곤은 온 우주를 건너서라도 태을을 직접 찾아온다.
물론 태을이 그간 김은숙 작가가 만들어왔던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와 같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여자 주인공이 터프한 성격으로 싸움을 잘한다고 해서 시대상을 반영한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구서령이라는 인물의 한계
대한제국의 총리인 구서령(정은채 분)이라는 인물은 김은숙의 여성 캐릭터 한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작품 곳곳에서 김은숙 작가가 여성 캐릭터를 평가하는 기준이 서령의 대사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황제 폐하의 취향이 나이 든 여잔지는 모르겠지만"(5화) 등의 경악할 만한 대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외모, 나이가 여성 캐릭터들의 경쟁력인 것이다.
극 중에서 서령은 소위 야망 있는 '능력 캐'이다. 더할 나위 없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명문 학교를 졸업하고 공영 방송 아나운서가 됐고, 입사 4년 만에 메인 앵커가 되었으며, 정계 진출 7년 만에 총리가 되었다. 총리가 되었음에도 그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끝없이 높은 곳을 꿈꾼다. 하지만 서령이 꿈꾸는 최종 목표는 황제의 여자 친구이다.
서령을 향한 평가 역시 외모나 황제와 관련된 것이 전부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역시 스스로 능력보다는 외모로 평가받기를 원해 보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말보다는 성형 의혹에 더 발끈하고, 국정보다는 황제와의 스캔들에 더 신경 쓴다. 높은 굽으로 아픈 다리를 매번 주무르지만 하이힐을 포기하지 못한다. 서령이 계속해서 태을을 향해 외치는 "어려? 예뻐?"라는 대사에서도 그의 가치관을 알 수 있다.
서령 역시 태을처럼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황제를 견제할 유일한 권력인 것 같았지만, 이렇다 할 반격 없이 너무 쉽게 무너진다. 충분히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이렇게밖에 소비할 수 없었을까? 왜 능력 있는 최연소 여성 총리의 야망이 고작 누군가의 여자 친구여야 하는가? 왜 남성 캐릭터들이 멋지게 사건을 해결할 때 능력 면에선 뒤지지 않는 여성 캐릭터는 한 발 물러나 외모만 가꾸고 있어야 하는가? 아쉬움이 남는다.
김은숙 작가는 2017년 한 인터뷰에서 남성 캐릭터만 부각하는 자신의 드라마 특징에 대해 말했다. 시대가 변하고 있는 만큼 그 요구에 따라 공부하겠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2018년, <미스터 션샤인>이 나왔다. 사랑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의를 향해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애신(김태리 분)의 캐릭터는 분명 그의 전작들과는 많이 달랐고, 시청자는 열광했다. 하지만 <더 킹>은 같은 작가가 2020년에 써낸 작품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시대를 역행했다. 드라마 밖의 시청자들은 나아가고 있다. 더 이상 신데렐라 스토리를 꿈꾸며 왕자님을 기다리지 않는다. 왜 드라마는 퇴보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