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 딸이 묻는다
"아빠는 몇 살이야?"
5살 딸의 물음에 그저 많다는 어정쩡한 대답으로 대충 얼버무리고 멋쩍은 미소를 보낸다.
"아빠는 어른이야?"
이 녀석, 갑자기 또 훅 들어온다. 나, 어른인가? 나이 먹으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건가? 아이가 던진 질문에 머릿속엔 작은 파문이 일렁인다. 이래서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라 하던가.
거의 모든 것을 일단 내면부터 샅샅이 훑어 답을 구하려는 전형적인 내향형 자기 성찰형 인간이라, 자극적이고 소란스러웠던 첫 회사를 퇴사한 뒤 고요하고 평범한 삶을 찾아 정착했다. 이어서 결혼에,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아이를 낳아 키운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그 세월 동안 나는 저절로 어른이 되는 자격을 얻은 걸까?
솔직히 지난 5년 간의 기억은 명료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파스텔톤으로 물든 어렴풋하고 아련한 추억들만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다. 첫째 딸이 태어나 정신없는 와중에 연년생으로 태어난 아들까지, 철부지 우리 두 부부의 손만으론 턱 없으니 장모님의 손을 빌어 여태껏 꾸역꾸역 삶을 끌고 온 셈이다.
결혼은 했지만 여전히 더 큰 어른의 힘을 빌려 살고 있는 내가 진짜 어른이라 할 수 있을까? 어른이 뭘까?
수직 관료제 조직이 익숙한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해가 넘어갈 때마다 1학년, 2학년, 3학년, 저절로 숫자가 커지는 학교에서 익숙해진 연공서열 시스템을 회사에 다니면서도 그대로 답습한다. 요즘은 좀 변화하는 추세인 듯 보이면서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거의 다 연공서열을 기준으로 입사 연차에 따라 직위가 부여되지 않나.
그러나 어른은 대리, 과장처럼 때가 되면 저절로 바꿔 다는 호칭 같은 게 아니다. 삶의 무게를 오롯이 홀로 견뎌내야 하는 게 어른이다(라는 게 내 생각이다).
자기 삶을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나 자신 내 가족들 내 힘만으로 오롯이 부양할 수 있을 때라야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거라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남에게 떠넘긴다거나, 자신이 응당 져야 할 책임을 은근슬쩍 회피하고 전가하는 사람들은 어른의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짐짓 흉내만 내고 있을 뿐.
한 편, 아무리 내 속을 훑어봐도 5살 딸이 던지는 근본적인 물음에 지혜롭게 당해낼 재간이 여전히 부족하다. 이제는 4살 아들의 질문공세에 대처하기도 벅찬 지경이다. 아이들이 부모의 배움과 성장에 유인을 제공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육아는 결국 아이와 어른이 함께 커가는 동행이다. 아이의 뜬금없는 질문에 즉답할 수 없으면 나 역시 아직 애어른에 불과한 거다. 아이가 자라는 만큼 부모도 자란다. 애어른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육아가 아닐까 싶다.
훈육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같은 심정을 느낀다.
끊임없는 자문자답이다. 아이에게 건네는 모든 말이 나에게 고스란히 돌아와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 아이에게 하는 훈육은 사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말은 흘러가지만 글은 남는다. 말과 글 사이에는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있다.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괜찮은 생각을 끼워 넣고 기록으로 남기는 이 행위를, 매일매일 치열하게 하면 나도 조금은 성장해갈까? 어른이 되어있을까? 다시 정신없는 5년을 보낸 뒤 돌아봐야 알아차릴 수 있을까?
언제나 물음표가 찍히는 일상이지만, 하나 확실히 드는 생각은 있다. 불혹이 몇 해 남지 않은 나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애매한 나이. 새로움과 안주의 경계에 서 있는 느낌 와중에, 항상 안주하는 삶이 주는 매력도보다는 새로움이 던지는 기대감에 마음이 더 기울기는 한다는 것. 요즘 세상도 그걸 독려하고 있는 듯싶고.
이제는 변화하지 않으면 정체가 아니라 도태다. 그 후퇴가 무섭기도 하니 달라짐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기도 하다.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 마음은 그대론데, 달라진 상황과 환경이 빨리 어른이 되라고 부추기는 것 같기도 한 마음이다. 가끔 무섭고 벅차지만 별 수 있나, 나도 같이 커가는 수밖에.
딸이 다음번에 또 같은 질문 하면 이렇게 대답해줘야겠다.
"아빠는 어른이야?"
"응 아빠도 어른 돼가는 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