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17년 여행의 시작,
8/22 Tuesday
이름도 낯선 동유럽 국가인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도착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친구와 연어덮밥을 먹고 난생처음으로 장염에 걸렸다. 기내식으로 나온 치킨이랑 생선 조금 먹었더니 또 장이 요동친다. 바나나만 먹을걸. 인천-모스크바행은 9시간 걸려서 힘들었는데 모스크바-빌뉴스행은 좌석도 넓고 금방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짐 찾는 곳에서 이민가방을 이동카트에 올리는 것도 옆에 계시던 아저씨가 도와주셨다.
친절한 사람들과 좋은 출발이지.
예약해 둔 공항 호텔에 5분 만에 도착해서 씻고 누웠다. 15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낯선 나라에 혼자 누워있다는 것도 실감하지 못한 채 잠들었다.
8/23 Wednesday
도착하기 전 매칭 되어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멘토 Shreya가 오후 3시까지 호텔로 오기로 했다. 어제 자기 전 불안한 마음에 혹시 안 가져온 게 있나 싶어서 기억을 더듬어 보던 중, 노트북 충전기가 떠올랐다. 32kg의 거대한 이민가방을 기숙사에 도착하기 전부터 풀어헤칠 순 없으니 일단 플랜 B로 근처의 전자제품 가게를 검색해봤다. 40분 거리에 있는 TAKAS 쇼핑몰에 삼성전자라고 뜨길래 바로 준비하고 버스 타러 나갔다.
어제는 저녁 늦게 도착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오늘은 보였다.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의 건물들은 바람 불면 무너질 것 같은 건물과 반짝반짝하는 새 건물이 한데 섞여있다. 그 사이로 지나가는 트롤리는 묘하게 낭만적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과 같은 수도이지만 어딜 가나 초록색을 볼 수 있었다.
충전기를 사러 탔던 버스에서는 노약자석 없이도 배려하는 젠틀한 모습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기도 백인, 저기도 백인, 나만 동양인. 여기저기서 들리는 낯선 언어들. 나 정말 외국에 홀로 떨어졌구나. 조금씩 내가 동양인이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눈을 마주치기에도 멎적고 딴청 피우기에도 무지 민망하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절대 흑인을 쳐다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도착한 TAKAS는 이마트같은 곳이었다. 넓은 대지의 1층 건물 안에 식당과 마트, 전자제품 가게, 옷가게가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너무 넓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서 인포데스크에 "Where is 삼성..?"하고 물었더니 영어를 잘 못하시는지 기다려보라고 하시더니 Office라고 했다.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40분 동안 찾아온 그 삼성전자는 매장이 아니라 사무실이었다. 혹시 몰라 다른 전자제품 매장인 Uronics가 오픈할 때까지 마트 Maxima를 구경했다. 여행을 다닐 땐 편의점이나 반찬가게에서 끼니를 때울 목적으로 주로 완제품을 찾았었는데 이제는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 식재료들을 살피다 보니 이 재미도 쏠쏠했다. 얼굴만 한 양배추와 팔뚝만 한 가지가 있는 재밌는 마트 구경이었다.
결국 충전기는 구하지 못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겨 멘토를 만나려고 로비로 서둘러 내려갔다. 약속시간이 30분이나 지나서야 도착한 내 인도인 멘토는 키도 작고 왜소했다. 내 몸무게보다 살짝 가벼운 이 거대한 이민가방과 캐리어를 둘이 옮기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택시가 도착하고 내가 짐을 실으려니까 오히려 택시 아저씨가 말리셨다. 익숙하지 않은 친절함이었다. 짐들은 아저씨의 손에 척척 자기 자리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 멘토와 대화를 좀 나눴는데 역시나 한국인을 택한 데에는 사심이 있었다. 그는 한국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내년에 꼭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나도 모르는 한국 드라마와 한국 아이돌 멤버의 이름을 줄줄이 외우며 너도 아냐고 물어봤다. 리투아니아어로 Vilnius Gelezinkelio stotis라고 발음하는 빌뉴스 기차역에 도착해서 우리는 Kaunas로 가는 기차를 탔다. 카우나스는 작은 시골 마을로, 내가 다니게 될 카우나스 공과대학(Kaunas Technology University, KTU)를 중심으로 성장한 작은 마을이다.
기차까지 가는 길에 올라가는 계단에서도 어떤 멋진 금발머리 언니가 ‘Let me help you’라며 순식간에 짐을 옮겨줬다.
뉴욕을 여행했을 때도 짐을 대신 들어준 분들이 몇 번 있었다.
이때까지는 몰랐지만 유럽 여행을 다니다 보니 계단 앞의 큰 짐을 옮기는 여성을 돕는 것은 노인 앞에서 지하철 자리를 양보하는 것처럼 당연한 매너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동의 없이 짐을 옮기고선 팁을 강요하는 에피소드도 많이 들어왔지만, 나는 운 좋게도 쿨하게 떠나는 언니의 도움으로 무사히 기차에 올랐다. 공항에서부터 시작된 행운이 이름도 낯선 이 나라에서 계속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