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윤리와 성장으로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 겉핥기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Spider-Man: No Way Home, 2021)(감독: 존 왓츠, 출연: 톰 홀랜드, 젠데이아 콜먼, 베네딕트 컴버배치, 제이콥 배덜런, 마리사 토메이 외)
* 이 글에는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MCU 스파이더맨의 3번째 영화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 그중에서도 스파이더맨 2(2004, Spiderman2)를 가장 좋아하는데요. 상대적으로 MCU의 스파이더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영화 같지 않고, 그저 큰 세계관의 작은 이야기 정도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번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은 아주 독특한 설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기대도 많이 했고, 영화를 보며 오랜만에 즐겁게 관람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보며 사이버 매체 윤리, 교정적 정의, 운명에 대한 태도, 그리고 청소년기 아이들의 성장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사이버 매체 윤리와 관련된 물음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새로운 기술들이 등장했고, 그에 따라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윤리적 문제들이 등장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이버 공간에서의 윤리적 문제인데요.
영화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언론 매체의 왜곡된 보도와 그에 따른 여론 재판이었습니다. 극 중에서는 피터가 스파이더맨이며, 그가 미스테리오를 죽였다는 사실이 보도됩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정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보도로 인해 피터의 개인적인 삶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대중이 믿게 된다.”는 나치의 공보장관 괴벨스(Dr. Paul Joseph Goebbels, 1897-1945)의 말처럼, 공식적으로 선포된 거짓 뉴스로 인해 대부분의 대중들은 잘못된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여론의 재판이 시작됩니다. 그러자 피터뿐 아니라 피터의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고통을 겪게 됩니다. 심지어 그의 친구들은 그저 피터의 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 대학 입학을 거부당하게 되기까지 하죠. 그리고 이러한 재판의 영향은 피터의 스파이더맨 복장에 묻은 페인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는 현대 정보사회에서 언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하며, 언론의 윤리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합니다. 그리고 피터 파커 기사 하나로 작았던 데일리 뷰글의 규모가 거대해진 것을 보며 하나의 보도로 한 언론의 영향력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스파이더맨 영화의 가장 중요한 철학 중 하나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입니다. 이는 비단 스파이더맨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언론뿐 아니라 우리 개개인 역시 왜곡된 정보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언론이 제시하는 문제들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혹은 미디어 문해력이라고 합니다. 미디어 문해력의 필요성은 과거의 사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거 대중들은 언론에서 보도한 기사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가수 중 한 명이었던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1958-2009)은 여러 루머에 시달렸습니다. 그중 하나는 그가 백인이 되고 싶어 하얗게 성형수술을 했다는 루머였습니다. 진실은 그가 백반증(vitiligo, 색소세포의 파괴로 인하여 여러 가지 크기와 형태의 백색 반점이 피부에 나타나는 후천적 탈색소성 질환**)을 앓고 있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박피를 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대중은 그가 백인이 되고 싶어 하는 흑인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두 차례 아동 성추행을 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요. 재판 결과는 무죄였지만 대중들은 그가 성추행범이었다는 사실만을 기억합니다.
최근 대한민국에서는 문해력이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심심한 사과의 말씀드립니다”라는 한 회사의 사과문에 “어느 회사가 사과문에 심심한 사과를 줌” “심심한 사과? 난 하나도 안 심심해” 등의 댓글들이 달리면서 논란이 일어났는데요. 이 외에도 초등학교 가정통신문 중 급식 안내 문구에 “중식”이라는 문구를 보고 “우리 아이는 중식 말고 한식이나 일식도 먹는다”며 민원을 넣은 학부모 등의 사례에서, 실질적 문맹률이 높다는 우려가 생겼습니다.
언론의 여론 호도, 혹은 잘못된 사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미디어 문해력이 절실합니다. 특히 디지털 사회에서는 문장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 사회를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최근 학교에서도 문해력과 관련된 교육을 교육과정에 편입하여 실시하고 있고, 사교육계 역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과목별 문해력 교과서가 따로 나오기도 하는 등 여러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왜곡된 보도로 인한 윤리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거대 권력에 대해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또 이 영화가 교정적 정의에 대해 고민할만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피터는 여러 차원에서 피터의 차원으로 넘어온 빌런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들은 원래의 차원에서 죽을 운명이었지만 차원을 넘어 들어오면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런 그들을 원래 차원으로 돌아가게 하여 그들이 예정된 죽음을 맞이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피터는 그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낍니다. 그들은 저마다 어떤 연유로 인해 빌런이 된 인물들입니다. 만약 빌런이 된 원인을 찾아 치료한다면 그들은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피터는 생각합니다.
이는 교정적 정의의 문제를 야기합니다. 교정적 정의(矯正的正義)란, 잘못이 있을 때는 공정하게 처벌하고 피해가 발생했을 때는 합당하게 배상하여 정의(正義)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에는 교정적 정의를 주로 응보적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응보적 관점의 정의(Retributive Justice)란, 잘못된 행동이 있을 때 그에 상응하는 고통(처벌)을 부여하는 것으로 사회를 통제하고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정의를 말합니다.**** 즉 정의란 잘못한 사람에게 처벌을 내리는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정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고 그들 사이의 분열을 고착화시킨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또한 그와 같은 관계의 단절로 인해 공동체의 협동이 저해될 수 있다는 단점 역시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처벌만을 강조하다 보면, 처벌받은 사람의 반성은 존재할 수 없고 오히려 처벌이 자신의 행위의 면죄부가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가해자의 진정한 반성과 그에 상응하는 피해자의 용서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예를 들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진정성 있는 화해와 용서가 없이, 가해자가 단순히 징역을 살았을 경우 징역을 살고 나온 가해자는 복수심을 가질 수 있고, 마찬가지로 피해자는 자신들이 피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복에 대한 불안에 떠는 상황과 같은 현상을 응보적 정의의 관점은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관점이 바로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istice)입니다. 회복적 정의는 가해자와 공동체가 피해자의 피해가 최대한 회복되도록 돕는 과정에서 정의가 온전히 이뤄질 수 있다는 신념에 기반한 관점입니다. 즉 가해자를 단순히 피해를 일으킨 절대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바라보고, 진심으로 반성한 가해자가 피해자를 도와 발생한 피해를 회복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관점입니다. 저는 물론 여기에 가해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책임 역시 지워야 한다고 봅니다만, 어쨌든 교정의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저는 피터가 상대적으로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 가까운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피해자와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거나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정확히 해당 개념에 합당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가해자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영화에서의 가해자, 즉 빌런들은 각자 신체적 혹은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문제가 해결된다면 빌런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적어도 피터가 판단할 때에는 말이죠. 그리고 만약 그들의 문제가 해결되어 그들이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은 일종의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피터가 빌런들의 문제는 자신과 상관없다고 말할 때, 그 말을 들은 메이 숙모는 사람을 돕는 게 우리의 일이라고 대답합니다. 만약 우리가 타인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도와야 하는 의무가 발생한다는 것이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스파이더맨의 기본 철학이 이 생각에 반영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범죄자의 교화는 정말 어렵습니다. 범죄자 본인이 반성하고 인격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먼저 변화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즉 범죄자 본인의 사고방식이 변해야만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범죄자가 교화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시간과 비용이 지불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즉 그들의 교화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은 어찌 보면 그 사람에 대한 낙인을 찍는 것이며 그 사람의 사회생활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종교적 관점에서 회개와 용서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인간은 늘 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지만, 그 죄를 반성한다면 신은 모든 잘못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신은 인간에게 자신이 인간을 용서하였듯 서로를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해당 관점은 죄를 다루는 법적인 관점을 넘어 윤리적인(혹은 종교적인) 관점까지도 고려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영화는 단순히 빌런들을 교화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보다 더욱 복잡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범죄자를 교화하는 과정에서 선량한 다른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큰 피해를 입는다면, 그 교화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극 중에서 메이 숙모는 이중인격으로 인해 악한 존재가 되어버린 그린 고블린, 노먼 오스만에 의해 죽게 됩니다. 저는 선량한 사람들을 희생하면서까지 범죄자들을 교화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저는 범죄자를 교화해야 하며 그들로 인해 발생한 피해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지만, 거기에는 선량한 사람들의 보호라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한가요?
피터가 빌런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말에 닥터 스트레인지는 죽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이 순리에 맞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처음에 이 씬을 보았을 때 닥터 스트레인지는 운명에 순응하는 입장이며, 피터는 운명을 거스르고자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곱씹어보면, 사실 닥터 스트레인지가, 죽는 것이 빌런들의 운명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운명이라는 것은 누구도 알 수 없고, 빌런들이 죽을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새로운 곳으로 이동했다면, 새로운 시간선이 만들어졌다는 의미이므로 이미 죽을 운명으로부터 그들은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빌런들을 돌려보내서 죽일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줄 것인가는 새로운 선택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닥터 스트레인지의 입장은 운명에 대한 순응이라기보다는 운명 앞에 우리는 무력하다는 체념에 가까운 태도로 보입니다. 운명에 대한 순응은 주어진 운명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능동적인 개념입니다. 반면 운명에 대한 체념은 운명은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운명은 알 수 없으므로 단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행위를 선택하고자 하는 피터가 오히려 운명에 순응하는 입장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피터가 운명에 순응하고 있다는 것은, 모든 사건이 끝나고 자신의 친구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 이외에는 세계의 위기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책임지지 못하는 미숙한 아이가 책임질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전 영화들에서 피터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였으나, 그 성장에는 주위 조력자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피터는 그야말로 모든 조력자를 잃고 혼자 자립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성장한 모습을 보입니다.
처음 피터는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상황, 특히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 상황에 직면합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청소년 시기에 자신이 숨기고자 했던 정체가 탄로 났을 때의 피터의 심정은 참담했을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실제로 MJ와 함께 빌딩의 높은 곳에서 아스팔트 아래의 지하철까지 추락해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피터가 느끼고 있을 심리적 추락과 비슷한 결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청소년기의 중요한 과업 중 하나인 자신과 친구들의 진학 문제까지 달린 일이었습니다. 그 충격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피터는 이 문제를 메이 숙모, 해피 호건, MJ, 네드, 닥터 스트레인지 등 주위의 조력자들과 함께 해결하고자 합니다. 이 문제의 법적 대응을 논의하기 위해 그들이 원탁에 모인 것으로 보아 그들의 관계는 수평적임과 동시에 안정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로 원탁은 상하가 없는 수평적인 관계를 상징합니다.) 앞서 피터 혼자 지울 수 없었던 페인트 자국 역시 조력자인 메이 숙모에 의해 깨끗하게 해결된 것처럼, 피터의 조력자들은 든든하게 피터를 보호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닥터 스트레인지의 주문에 피터가 개입하면서 엄청난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했던 닥터 스트레인지와 다른 길을 걷게 되었으며, 자신이 가장 의지하고 사랑했던 메이 숙모를 잃게 됩니다. 그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했던 조력자를 잃게 된 피터는 절망하여 학교 옥상으로 향합니다. 혼자 있고 싶을 때 이 세계의 피터뿐 아니라 다른 세계의 피터들 역시 빌딩의 마천루 등 높은 곳으로 향한다는 점은 흥미롭니다. 높은 곳은 일반 사람들은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있을 수 있습니다. 홀로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찰이 가능해집니다. 그 성찰 후엔 높은 곳에서 보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혹은 자신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즉 자신과 주변사람들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가능해지는 공간이 피터에게는 옥상이었던 것입니다. 영화에서 자신에 대한 성찰은 다른 세계에서 온 자신(들)과의 대화를 통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은 MJ와 네드를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부모와 같은 존재들의 도움 없이, 피터(들)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전문적 장비 없이 고등학교 실험실에서 피터들의 노력만으로 해결책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처음 피터가 빌런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와 마찬가지로 유사 아버지의 역할을 했던 토니 스타크의 기기를 활용하는 장면과 대조됩니다. 또한 이는 한 청소년이 부모의 그늘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는 과정을 묘사했다고 여겨졌습니다.
빌런들의 문제가 해결된 후,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터는 큰 결심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세계로 다른 모든 차원의 빌런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피터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주문을 실행시켜 달라고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요청합니다. 아직 어른이 아닌 존재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잊힌다는 것은 엄청난 공포일 것입니다. 이는 “함께”라는 개념조차 희생하는, 즉 사회적인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결심을 한 장소가 허드슨 강 한가운데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이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문학에서 강은 죽음 혹은 부활을 상징합니다. 피터는 이곳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잊히는 사회적 죽음을 선택함과 동시에 혼자서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의 새로운 탄생을 선택했다고 여겨집니다.
모든 일이 다 끝나고, 피터는 피터라는 존재를 잊은 MJ에게 향합니다. MJ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커피숍에 들어간 그는 MJ와 함께 있는 절친 네드를 바라봅니다. MJ와 네드는 따뜻한 커피숍 공간(노란빛이 감도는) 안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고, 피터는 차가운 겨울 뉴욕이 바라보이는 유리문(푸른빛이 감도는) 앞에 서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MJ, 네드와 피터는 마치 다른 공간 안에 서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피터는 자신의 정체를 MJ에게 말하려고 하지만, MJ 이마의 상처를 본 순간, 그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습니다. 만약 자신과 함께 한다면, 그녀와 네드 모두 다시 위험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죠. 결국 그는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그 유리문 앞을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자신이 들어왔던 그 문을 열고 차가운 세상 속으로 유유히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가 찾은 곳은 메이 숙모의 묘지였습니다. 그녀의 묘지에는 많은 꽃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녀의 묘비에는 “누군가를 돕는 건 모두를 돕는 것”이라는 문구가 쓰여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신념이 깊이 뿌리내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듯 그녀의 묘지 근처에는 수많은 나무들의 수많은 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피터를 비춘 앵글의 배경에도 역시 굵은 기둥의 나무가 마치 그를 든든하게 보호하듯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터는 그 기둥이 있던 앵글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기둥의 보호로부터 벗어나 이제 그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기둥이 될 것이라는 듯 말입니다.
피터는 이제 어린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고난을 겪은 후 그 자신이 다른 이들의 조력자가 되어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스파이더맨의 철학은 이제 시작되려고 합니다. 그는 영화의 마지막,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파악하고 창문 밖으로 자신을 내던집니다. 그는 추락하듯 세상으로 향하지만 이내 거미줄을 쏘아 다시 날아오릅니다. 앞으로 그의 여정은 고난을 겪고, 그 고난을 극복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여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청소년기의 성장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청소년기는 어른과 아이 사이의 과도기적 시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부모와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지는 연습을 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만약 청소년기의 자녀를 둔 부모라면, 혹은 청소년 주위에서 그들과 함께하는 어른이라면, 어른이 지시하고 청소년이 이에 따르는 상명하복식의 의사소통보다는 청소년들의 자율성을 길러줄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교육하는 방식의 의사소통이 필요할 것입니다. 청소년들의 성장은 그들의 성장에 대한 어른들의 믿음으로부터 시작될 테니까요.
*출처: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9E%8A%ED%9E%90_%EA%B6%8C%EB%A6%AC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6790&cid=51007&categoryId=51007
*** 출처: 두산 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924990&cid=40942&categoryId=3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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