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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리로 인생핥기 Oct 16. 2024

이상과 일상의 충돌로 본 이니셰린의 밴시

대승불교의 일체유심조를 바탕으로 이니셰린의 밴시 겉핥기

   

이니셰린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rin, 2023)(감독: 마틴 맥도나, 출연: 콜린 파렐, 브렌단 글리슨, 케리 콘돈, 배리 케오간 외)    

 

* 이 글에는 이니셰린의 밴시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독특한 호흡과 흐름을 가진 블랙 코미디 영화입니다. 아일랜드 내전 시기, 이니셰린이라는 가상의 섬에서 두 남자가 겪는 일련의 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잔잔한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주인공 콜름(브렌던 글리슨 분)의 단지(斷指) 이후부터 극의 흐름이 바뀌며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찝찝한 뒷맛을 남기며 마무리됩니다. 저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이 작은 소동극을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두 세계의 충돌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충돌을 해결하기 위한 해결 방안으로 인간이 느끼는 모든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는 대승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이상을 위해 일상을 파괴하는 자     


 주인공 콜름은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는 여생 동안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그가 추구하는 업적이란, ‘이니셰린의 밴시’라는 곡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처했던 현실은 작은 섬(이니셰린)에서 가축을 기르는 한심한 친구와 술을 마시는 일상이 전부였습니다. 어느 순간, 그는 이대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그가 친구인 파우릭(콜린 파렐 분)과 어떻게 지냈는지 그 전사(前事)에 대해 묘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관객은 그가 이상을 추구하고자 마음먹기 전에 어떤 인물이었는지 파우릭 등 주변 인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파우릭에게 어떤 모습을 보였든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상을 향한 열망이 항상 꿈틀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절친이라 여겨지는 파우릭은 그런 콜름의 열망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콜름이 이상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영화는 ‘바다’라는 소재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콜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씬에서, 그는 자신의 집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집 밖의 창을 통해 파우릭이 그런 콜름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파우릭이 콜름을 바라볼 때, 파우릭의 그림자로 인해 창문 내부의 콜름의 모습이 비칩니다. 그러나 파우릭의 부름을 콜름이 무시하자, 파우릭은 이내 펍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때 콜름의 모습은 창밖에 비친 풍경으로 인해 가려지고, 파우릭의 그림자로 인해 보이지 않던 바다와 의자(바다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단)의 형상이 창문에 반사되어 비칩니다. 그리고 마치 평화가 찾아온 듯 조용한 파도 소리만 그 창에 남습니다. 이 짧은 오프닝 씬을 통해, 관객은 콜름이 파우릭의 그림자로 인해 바다, 즉 콜름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가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게 됩니다. 콜름은 파우릭이 상징하는 일상보다는, 그에 의해 가려서 보이지 않던 더 넓은 어떤 것, 즉 이상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다가 이상을 상징한다는 것은 시종일관 콜름이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유추할 수 있습니다. 펍 바깥 테이블에서 파우릭과 대화할 때에도, 파우릭이 콜름을 바라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콜름의 배경과 그의 시선이 닿는 것은 바다입니다. 파우릭이 말을 걸 경우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엄포를 놓은 뒤, 콜름은 아예 해변가로 나와 바다를 응시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역시 그는 마찬가지로 해변가에 서서 바다를 응시합니다. 바다는 그의 눈에 넓게, 멀리 펼쳐져 있습니다. 마치 켜켜이 쌓인 인류의 역사, 혹은 그 역사의 흐름과 같습니다. 그의 인생은 짧지만, 그가 의미 있는 어떤 것(음악)을 남긴다면, 그의 인생은 의미를 찾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콜름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콜름은 바다(이상)을 바라보지만 파우릭은 콜름과의 관계(일상)을 바라본다(출처: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영화에서는 유독 ‘창문’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데요. 영화에 등장하는 이 창문을 ‘마음의 창’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흥미로운 지점들이 생깁니다. 창은 서로 다른 공간(내부와 외부)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 공간을 안과 밖으로 분리하기도 합니다. 벽의 안쪽에 위치한 사람과 바깥쪽에 위치한 사람은 같은 창을 사이로 서로 다른 공간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서로가 보고자 하는 것만을 자신만의 창, 즉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이 다르다면 모든 것들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주로 파우릭은 바깥 위치에서 공간 내부에 있는 콜름을 바라봅니다. 그의 시선에는 콜름밖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반면, 콜름의 모습을 담은 카메라는 내부에 있는 콜름의 얼굴 옆 창에 비치는 넓은 바다를 담습니다. 그리고 주로 파우릭은 콜름이 위치한 평온한 창문에 침입하는 듯한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바다(이상)를 보고자 하는 콜름을 방해하기라도 하듯 말입니다.     

파우릭의 이미지는 콜름의 공간에 침입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출처: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영화는 파우릭의 시선을 따라가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관객은 콜름의 행동으로 인해 파우릭이 느꼈을 당혹스러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콜름의 갑작스러운 절교, 그리고 그가 내린 극단적인 선택들은 언뜻 보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추측하건대, 콜름은 이미 파우릭에게 일상적인 것만을 추구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나 언질을 수없이 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다정함을 동반한 모든 시도가 통하지 않게 되자,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위해 일상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콜름의 행동은 쉽게 정당화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추구하는 이상이 훌륭하더라도 일상을 비상식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마냥 옳은 것은 아니니까요.     


일상에 취해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     


 이에 비해 파우릭은 일상에 취해 사는 평범한 남자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파우릭과 같이 일상적인 삶을 살 것입니다. 그에게는 원대한 이상과 목표가 없습니다. 다만 그는 친한 친구, 사랑하는 여동생과 그저 하루하루를 즐기는 데에만 관심 있습니다. 즉, 그는 일상 속에서 나누는 다정함에만 몰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콜름이 바라보는 이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파우릭이 일상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영화는 ‘돌담길’이라는 소재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냅니다. 그의 집은 돌담길 앞에 마주하고 있으며, 바다와는 떨어진 육지에 있습니다. 돌담길은 안정적이고 정해져 있는 일상을 상징합니다. 파우릭은 주로 그 돌담길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가 돌담길을 벗어날 때에는, 돌담길을 벗어나 해변가에 위치한 콜름의 집으로 향하거나 혹은 맞은편에서 노파, 맥코믹(쉴라 플리톤 분)을 피할 때뿐입니다.) 반면, 콜름은 돌담길을 가로질러 가거나, 파우릭이 오는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지나갑니다. 콜름에게 있어 돌담길은 일상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아니라 이상을 가로막는 답답한 장애물일 뿐입니다.     

돌담길은 파우릭이 추구하는 정해진 일상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콜름은 그러한 일상을 거스르려 한다(출처: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그런 콜름의 모습을 파우릭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콜름이 첫 번째 손가락을 자른 후, 파우릭은 도미닉(배리 케오간 분)과 함께 나란히 바닷가에 위치한 절벽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보고자 하는 자(파우릭은 콜름, 도미닉은 시오반(파우릭의 여동생, 케리 콘돈 분))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콜름과 시오반은 모두 바다, 즉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들입니다. 심지어 시오반은 극 후반, 아예 이니셰린을 떠나 바다를 건너 뭍으로 향합니다. 그런 그들(콜름과 시오반)을 이해하려면 바다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파우릭과 도미닉은 바닷가를 앞에 두고서도 서로만을 바라보고, 그들이 상대하는 자들에 대해 오해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오해는 각각의 파국을 맞이합니다.     

파우릭과 도미닉은 바다를 향하지만 바다를 보려고 하진 않는다(출처: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콜름이 바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는 두 씬이 있습니다. 콜름이 처음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엄포를 놓은 뒤, 파우릭은 해변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콜름을 향해 다가갑니다. 파우릭은 콜름이 바라보는 바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콜름이 이전과 같이 자신과 놀아주기를 바랄 뿐이었죠. 따라서 콜름이 바라보는 바다를, 파우릭은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콜름의 다른 손가락들이 잘리고, 파우릭이 아끼던 당나귀가 그 손가락을 먹다가 목에 걸려 세상을 떠난 후, 파우릭은 다시 해변가로 콜름을 찾아갑니다. 파우릭은 도대체 콜름이 추구하는 무엇이 일상을 파괴할 정도인지 궁금해하며 바다를 흘깃 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바다, 혹은 이상의 중요성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다를 응시하는 콜름을 두고 바닷가를 떠나 육지로 나아갑니다. 그 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한 것처럼 보입니다.     


파국에 대해 불교가 제시하는 해결책, 일체유심조     


 ‘이니셰린의 밴시’에서의 ‘밴시(Banshee)’는 켈트족 신화에서 여신 혹은 유령의 형태로 등장하는 요정입니다. 이 요정이 지니는 큰 특징은 구슬피 울음으로써 어떤 사람의 죽음을 미리 알린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불길한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영화 속에서, 이니셰린에 존재하는 밴시는 아마도 노파인 맥코믹일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맥코믹은 죽음을 예견하는, 그야말로 음침한 노파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죽음에 관한 그녀의 예언은 영화 속에서 모두 실현됩니다. 따라서 저는 이 노파를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 즉 운명으로 해석했습니다. 영화의 막바지, 콜름과 파우릭이 헤어질 때, 노파는 언덕 위 의자에 앉아 해변가에 있는 둘을 바라봅니다. 그 씬에서 노파는 프레임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노파 기준 왼편 바닷가에는 바닷가를 바라보는 콜름이 서 있고, 오른편에는 내륙을 향해 파우릭이 걸어갑니다. 이는 운명이 이 둘을 갈라놓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운명이 서로 다른 길을 가는 둘을 묵묵히 바라보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서양 사상에서 운명은 결정론의 성격을 지닙니다. 결정론이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이나 선택의 자유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인과(因果) 관계의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론을 말합니다.** 결정론에 따른다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일들은 ‘일어날 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과거뿐 아니라 미래까지 결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운명에 대입한다면, 운명이란, 인간이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결정된 미래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레 무기력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을 텐데요. 서양 사상에서는 결정론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자유로울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차피 운명은 인간이 알 수 없기 때문에 미래에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운명에 체념하기보다는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덤덤히 받아들이며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고 이야기합니다.     


 불교에도 이와 유사한 이론이 있습니다. 바로 연기설인데요. 연기설(緣起說)이란, 불교 사상의 우주론으로, 모든 것은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조건인 연(緣)에 의해 일어난다 [기(起)]는 이론입니다.*** 얼핏 보면, 과거의 행위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결정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물론 ‘현재’를 바라볼 때 결정론과 연기설의 입장은 동일합니다. 즉 현재 나에게 벌어진 일(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은 모두 과거의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대하는 태도에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결정론은 미래 역시 모두 결정되어 있다는 입장인 반면, 연기설은 현재 내가 어떤 업(業)을 쌓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결말부의 콜름과 파우릭의 모습을 해석한다면, 결정론의 입장에서는 운명이 둘을 갈라놓았고 이는 필연적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연기설 역시 과거의 둘의 행동과 생각의 차이가 현재 그 둘을 갈라놓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기설은 그 둘이 앞으로 서로에 대해 어떤 입장과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 그 둘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둘의 관계는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요? 저는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대승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일체유심조란,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뜻하는 불교 용어입니다. 《화엄경(華嚴經)》의 중심 사상으로, 일체의 제법(諸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존재의 본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건데요.**** 이런 관점에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은 결국 마음속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은 어떤 식으로 고통을 야기할까요. 저는 인간이 겪는 여러 고통은 결국 세상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흔히 겪는 인간관계에서의 고통을 따져 본다면, 결국 상대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직장 혹은 학교에서의 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체적인 고통 역시,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건지’ 생각하며 고통받습니다.     


 이를 콜름과 파우릭의 관계에 대입해 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콜름은 ‘이상(작곡)’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일상(파우릭과의 관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파우릭은 ‘일상(관계에 있어서의 다정함)’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가로막는 ‘이상(콜름의 작곡)’은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둘 모두 각자 자신 만의 가치관, 혹은 신념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이후에도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과 일상 모두 인간의 삶의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이상을 추구해야 개인과 사회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을 향유할 수 있어야 개인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고, 항상 함께하는 주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둘의 관계는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잠시 보류하고, 나와 관계하는 상대방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바라보고 이를 포용했을 때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콜름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극단적인 행위를 취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파우릭이 중시하는 가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는 파우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콜름이 작곡을 한다고 했을 때 그는 이를 이해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전에 보여주었던 일상의 다정함을 강요하기만 했죠. 만약 이들이 자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서로를 포용하고자 한다면, 그들의 관계는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과 일상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갈등은 사실상 가치관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갈등을 통해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고, 이를 계기로 더욱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만의 입장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는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이 중요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가장 기본적이고 흔한 말 같지만 경청을 실천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이 이야기를 적는 저 역시 혹시 나만의 가치관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없는지 경청하고 돌아보아야겠습니다.           


* 출처: [나무위키] 밴시

(https://namu.wiki/w/%EB%B0%B4%EC%8B%9C​)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결정론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59547&cid=40942&categoryId=31819)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연기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42969&cid=47331&categoryId=47331​)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25302&cid=40942&categoryId=3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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