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칸트, 민주주의의 관점으로 바라본 위키드:포굿
이 글은 영화 위키드, 위키드: 포굿(Wicked: For Good, 2025)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가족들과 함께 영화 위키드(Wicked, 2024)를 극장에서 즐겼습니다. 특히 유명한 넘버 중 하나인 defying gravity가 흘러나올 때, 그리고 앨파바(신시아 에리보 분)가 하늘로 날아오르며 영화가 막을 내릴 때의 감동은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랬기에 이번 2편, 위키드:포굿에 대한 기대가 한껏 올라가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희 가족 세 식구 모두의 스케줄이 맞았던 주말, 이 영화를 보았는데요. 전작과는 다른 의미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초중반까지 영화는 그럭저럭 핵심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작에서 이어져 오던 오즈의 동물에 대한 차별은 이번 편들어 더욱 심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곰 유모에게서 자란 앨파바는 동물권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오즈의 마법사(제프 골드블룸 분)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동물들에 대한 인간들의 혐오는 마치 현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민국의 이민자 단속을 연상케 합니다.
동양의 철학자 장자(莊子, BC.396?-BC.286)는 인간의 잣대로 만든 가치에 따라 사물을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존재의 가치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인위적 가치는 존재들 간 우열을 설정하므로 더 좋은 가치를 갖기 위한 갈등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초래된다고 장자는 설명합니다. 최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남녀 갈등이나 정치적 갈등, 인종 차별 등은 모두 인위적인 가치에 따라 존재들을 구분한 결과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존재가 지니는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고 부당한 차별을 반대하는 장자의 태도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에서도 이와 같은 차별의 부당함을 설파합니다. 물론 그 근거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그럼에도 차별을 철폐하고 모두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좋은 결과임을 전제한 전개가 이뤄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옳은 방향처럼 보입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거짓'에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앨파바가 '진실'을 대변하는 것으로,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 분)가 '거짓'을 대변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진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지만, 모호하고 때로는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반면 거짓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오즈의 국민들은 오즈의 마법사가 제시하는 아름다운 거짓을 믿으며 쉽게 선동되고 쉽게 행복해합니다.
그래서 1편의 마지막, 앨파바의 각성을 통해 저는 비로소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앨파바는 편견에 맞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투쟁해 왔고, 이후로도 투쟁할 것이니까요. 이번 영화의 클라이맥스, 앨파바는 도로시가 오기 전에 어두운 방구석으로 글린다를 들여보내고, 최후를 맞이합니다. 특히 이 씬이 인상 깊었는데요. 이 씬에서 카메라는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두 사람을 비춥니다. 불편한 진실을 상징하는 어둠 속에 글린다가 위치해 있고, 아름다운 거짓을 상징하는 밝은 빛이 비치는 곳에 앨파바가 위치해 있습니다. 완전히 대비되었던 두 사람이 서로의 입장이 되어 보며 서로에게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통해 앨파바는 아름다운 거짓을 행할 것이며, 글린다는 불편한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릴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극적인 대비를 이렇게 훌륭하게 연출했으니 결말이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은 가히 충격적이 이었습니다. 오즈의 마법사가 제시하는 거짓이 글린다라는 아름답고 선동하기 쉬운 존재에 의해 대체된 것에 불과하니까요. 물론 후반부에 이르러 글린다에 의해 동물에 대한 차별은 사라졌지만, 거짓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앨파바는 오즈를 위협하는 절대악이었다는 거짓이 남아 있고, 자신이 죽은 것처럼 글린다를 속인 앨파바가 글린다와 약혼했던 피예로(조나단 베일리 분)와 다른 세계로 사랑의 도피를 하는 다소 비인륜적인 거짓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즈의 마법사라는 거짓이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좋은 결과를 유지한다는 명목의 거짓말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아마 영화는, 결과가 좋다면 그 행위가 옳다는 공리주의적 관점을 채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공리주의는 과정이야 어쨌든 최대한 많은 행복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고 규정합니다. 이를 영화에 대입한다면, 사회의 혼란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과정이 거짓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선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렇지만 좋은 결과만 가져온다면 모든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거짓에 대해 아주 단호한 입장을 지니고 있는 철학자 중 한 명입니다. 그에게 있어 도덕적인 행동이란, 우리의 의지가 개인적인 욕구나 욕망이 아닌 이성에 따라 판단한 보편적인 도덕법칙을 향한 행위라 규정합니다. 이때 보편적 도덕법칙은 크게 두 개의 형식을 지닙니다. 첫째,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도덕 법칙일 것. 둘째,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할 것. 칸트는 이와 관련해 도덕적 행위의 예시를 드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행위 원칙은 첫째 형식에 위배됩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은 상황에 따라 좋은 의도로 행해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대를 속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언제나 적용할 수 있는 행위 원칙이 아닙니다. 그리고 거짓말은 거짓말의 대상이 되는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이므로 둘째 형식에 위배됩니다. 따라서 칸트는 매우 단호하게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은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칸트의 관점에서는 아무리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라 하더라도 그 행위의 의도가 도덕 법칙을 향하지 않으면 비도덕적이라 못 박습니다. 왜냐하면 행위의 결과는 행위자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드러날 수 있고, 심지어는 나쁜 의도로 한 행위가 우연히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영화의 상황에서는 과연 그것이 좋은 결과인지도 미지수입니다. 오즈의 사람들은 오즈의 마법사가 떠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동안 혐오했던 동물들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사악한 마녀를 죽여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입니다. 이게 동일한 사람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만약 글린다의 거짓이 들통난다면, 과연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이는 영화(혹은 원작 뮤지컬, 혹은 원작 소설)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아주 분명히 드러내줍니다. 이 영화에서는 국민들이란, 단지 지도자에 의존하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거짓 선동에 대해 대부분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짓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앨파바가 그랬고, 피예로가 그랬으며 글린다가 그랬죠. 즉 오즈 국민들에 대한 영화의 가정은 이미 틀린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영화가 내린 결론은 평화를 위해 거짓된 믿음으로 국민들을 기만하는 것이었죠.
실제로 민주주의와 국민들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았던 학자가 있긴 합니다. 바로 엘리트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슘페터(Joseph Schumpeter, 1883-1950)입니다. 그에게 있어 국민들은 어리석고 선동되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적 지배란 어리석은 국민들의 지배가 아니라, 국민들보다 우월한 지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지닌 엘리트들의 지배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 행해지는 투표는, 국민들의 직접 통치 수단이 아니라, 자신들을 지배할 지배자를 선택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는 어리석은 국민들의 정치 참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쉽게 선동되므로 잘못된 결정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영화의 입장은 이와 같은 슘페터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물론 이 작품이 뮤지컬 판타지라는 장르적 특성을 지닌 만큼, 동화적 허용을 감안하지 않고 엄격한 '현실 정치'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가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교육 수준이 점차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교육적 차원에서 이른바 어리석은 정치인 중우정치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가짜 뉴스 등에 의한 선동이 여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또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과 민주시민 교육을 통해 예방할 수 있습니다.
참여 민주주의, 혹은 심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저에게 있어 이 영화의 메시지는 상당히 불쾌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거짓된 토대 위에서 국민들을 존중하지 않는 글린다의 이른바 '통치' 행위는 과연 정당한 행위일까요? 그것이 과연 오랫동안 유지되며 평화로운 공동선을 이룰 수 있을까요? 후에 글린다가 앨파바의 거짓을 눈치챈다면, 앨파바가 꿈꾸던 모든 존재들의 조화를 유지하고자 할까요? 아니면 오즈의 마법사처럼 국민들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고, 차별을 조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영화에 대해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비슷한 생각을 아내도 하였기에 저와 아내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희 부부의 결론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오해하지 않도록 아이들에게 교육이 필요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내용을 본 아이들이 잠재적으로 거짓을 옹호한다거나, 혹은 엘리트 민주주의적 사고를 하게 된다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넘버나 화려한 연출을 떠나 이 작품 속 철학의 부재에서 오는 한계는 명확합니다. 1편이 워낙 좋았기에 그 역체감은 더욱 심했고 그렇기에 더욱 아쉬웠습니다.
영화의 부제는 포굿, 즉 '좋음을 위하여'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공동선을 위하여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에 근거한 공동선을 과연 공동선이라 할 수 있을지, 주인공들의 선택이 과연 좋음을 가져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때의 '좋음' 그 자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특히 좋음에 대한 정의가 달라 갈등하는 이 시대에 좋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