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탓'이라는 알고리즘에서 벗어나기
대학 시절 방학이면 육아방송 보기가 하나의 과제였어요. 누군가 보라고 시킨 적은 없었습니다. 학기 중에는 과제로 인해 볼 틈이 없기 때문에 방학 때 주로 육아 방송과 육아서를 찾아보았지요. 취업을 하면 부모님들을 만나야 하기에 아이를 양육한 경험이 없는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교과서였습니다. 네, 바로 글로 육아를 배운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당시에도 어린 시절의 우리 가정의 모습이 문득 떠오르 적도 있었지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방송을 보면서 발달 과정이나 상담 기법 몇 줄을 필기하기 바빴습니다. 나만의 과제를 마치고 김밥 ㅇ국으로 달려가 밥을 사먹으러 갈 생각에 들떴으니까요. '나는 아이를 저렇게 키우지 말아야지' 생각으로 매듭짓거나 몇 가지 발달 지식을 얻는 것으로 나만의 과제를 끝냈습니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나는 내 자녀에게 만큼은 꼭 공감하는 마음을 표현하겠다고 다짐했던 시간이에요. 나도 나의 친구도 내가 아는 언니, 오빠, 동생들도 '우리 부모님은 넘치도록 공감해주시는 분이셨어.'라는 말을 한 친구가 거의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 주변에서는요.
대학교를 다녔던 2007년~2010년은 IMF, 흩어진 가족, 다양한 가족의 형태로 인하여 아픈 가정사를 가진 친구(언니, 오빠, 동생)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었던 시절이기도 했어요. 우리 가정은 안전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요.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시울이 붉혀지던 그런 애틋한 20대 추억이 떠오릅니다.
사회 초년생 시기를 보내고 연애를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중국의 무료 동영상 사이트 주소를 알지 못하더라도 프리미엄 요금제를 내면 육아 방송은 몰아보지 않더라도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어요. 언어치료사의 입장에서도 10년 전, 20년 전보다 언어치료나 상담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졌습니다. 문턱을 낮추어준 효과도 육아 방송의 장점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부분은 방송사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부분인데, '양육자의 탓'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이에요. 특히 가장 절정으로 아이가 짜증을 내거나 부모가 화를 내는 모습만 몇 초 컷으로 편집되어서 돌아다니는 SNS 릴스는 더욱 더 극단적입니다. 아이를 양육하는 저 조차도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지옥인 것일까?'라는 생각으로 한숨이 나오기도 하고요.
* 육아 방송에 출연하고자 하는 용기를 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 안에 담긴 가정사, 방임, 방치, 폭력에 대한 이야기와는 별개로요.
생각해보면 우리는 성장 과정 중 소통을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대학교 교양 과목에서 들어보았음직 하고, 미혼 시절엔 육아 방송과 현장에서 어깨 너머로 보았던 모습이 대부분이었지요. 아이에게 이유없이 화가 날 때, 나와 닮은 모습을 마주하면 신경이 곤두설 때, 아이가 말대답을 할 때면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을 마주합니다.
가장 불편한 순간은 내 아이를 나도 모르게 나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버렸을 때예요.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만 되돌릴 수 없지요. 아이는 신기하게도 엄마의 약점과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 버튼을 절묘한 타이밍에 누릅니다. 오늘은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간만에 일찍 일어나서 책을 보려던 순간 아이가 깨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기도 하지요.
"금ㅇ이 방송 보니 대부분 엄마 잘못이던데..."
"저럴 거면 애를 낳지 말지."
"나도 저럴 까봐 애를 못낳겠다. 출산율 0.2% 가자!"
유튜브에서 이러한 댓글을 읽고 있자면 숨이 턱 막힙니다. '아이를 낳아보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지' 이렇게 생각하고 스크롤바를 내리기엔 어딘가 내 마음 속에 비수를 꽂는 듯 합니다. 엄마의 잘못이라는 키워드가 화가 났다가도 정말 나의 탓인 것처럼 느껴져요. 아이와의 소통을 다짐했던 힘이 10이었다면 댓글을 보는 순간 5로, 3으로 떨어집니다.
육아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오히려 많은 양육자들은 아이와의 소통에 있어서 답을 찾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에 받아보지 못했던 공감 때문일까요? 공감이라는 단어도 정의가 다양하더라고요. 마냥 아이에게 공감만 했다가는 아이의 행동 문제가 커진다는 이야기로 흘러가게 될 거예요. 이 공감 또한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그 기준이 애매한게 문제가 되곤 합니다.
그래도 단언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엄마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가정 안에서도 서로를 탓하기 보다, 나를 탓하기 보다 관점을 돌려야 합니다. 오늘부터 작은 말 한마디부터 아이에게 건내기. 무조건적인 "그랬구나"가 아니라 아이의 감정을 한번 더 살펴보는 것. 이렇게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가장 어려울 수 있는 또 하나의 혜안은 아이를 아이 자체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아이니까, 어린이니까' 할 수 있는 행동과 말을 이해하는 마음을 갖는 거지요. 육아 방송이 한 때의 저처럼 어설픈 전문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가정한다면 어떨까요? 방송은 방송으로 출연자의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 가정에 적용할 수 있는 답을 얻고, 타인의 가정에는 조언을 아껴두기로 해요.
아,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이도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서 호루라기를 가지고 오네요. 이러한 순간에 화 버튼을 순간적으로 누르지 않도록 평소에 우리의 마음 밭에 좋은 양분을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육아 방송이나 육아서가 아닌 나를 위한 영화나 에세지를 읽어보는 것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