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생일이다. 내 생일은 쉽다. 0123. 귀차니즘이 묻어나는, 초기 비번 같은 숫자 조합. 어쩐지 “옛다, 출생” 식의 시크한 느낌이 들어서 마음에 든다. 누군가 생일을 물으면 외우게 하기도 편하다. "1월 23일입니다" 대신 "0123. 아셨죠? 0123!" 하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일타강사처럼 알려줘봤자 내 생일을 굳이 암기했다가 축하해주는 사람은 없다. 정말 실망이다. 여튼, 어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생일을 진작부터 기념해 출근하지 않기로 했다. 핑계도 생겼다. 한파특보. 이 엄동설한에 내 취약한 몸뚱어리를 내놓는 일은 없게 하자.
휴가를 쓰기 전에 부서 직원 몇몇에게 말했더니 뭐 할거냐고 물었다. 딱히 할 일은 없었다. J(MBTI)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반응이 돌아왔다. 뭐 할 지 안 정해놓고 어영부영 보내면 휴가가 너무 아깝다고도 했다. 글쎄. 그건 쉬는 날의 본질을 간과한 거 같은데. 쉬는 날을 진짜 낭비하는 건, 쉬는 날마저 계획적으로 보내는 거 아닌가? 그러나 사회 생활을 정상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관계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지 고견을 구했다. 요즘 힙한 문화 공간이라든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를 추천 받았다. 청담동과 송파위례, 양평과 시흥의 링크가 전달되었다. 전부 매력적인 곳이었다. 다만 외출을 위한 마음의 준비가 덜 된 터라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어제 휴가 중 내가 유일하게 한 일은 미용실에 간 것이다. 실은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었다. 나는 외모를 잘 가꾸는 사람은 아니다. 미용실은 나의 관리 부재 상태에 대해 누군가 한소리를 할 때쯤 겨우 방문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내게 어떤 스타일링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저 뿌염 좀 하라고 말한다. 유전의 영향으로 30대 초중반부터 흰머리가 났으니, "흠, 뿌염할 때가 된 것 같은데"라는 권고를 듣기도 참 많이 들었다.
딴 얘기지만 내 흰머리에는 롤모델이 있었다. 이청준 작가였다. 작가를 흠모했던 십 대와 이십 대 초반에 내 노년의 외모 컨셉을 정해두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백발의 늙은이가 된 나, 완전 멋지겠군. 그 때는 천수를 누려야 백발이 될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웬걸,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루지 않아도 흰머리는 가열차게 자라났다. 백발계의 영재발굴단이 있다면 명함 한 번 내밀어볼 수 있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전체적으로 백발이 되려면 뿌리부터 점차 하얗게 되는 과정을 견딜 수 있어야 했고, 나는 그 과정이 어렵지 않다고 여겼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단지 주변인들이 보기 불편해하는 게 문제였다. 사회 생활을 계속 하는 한, 백발 기대 연령에 도달하지 않는 한, 나의 추구미는 훗날로 미루는 게 나았다.
최근 들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여러 말을 들었다. "흰머리를 하기엔 아직 젊은 것 같아요", "머리가 긴데 하얗게 둘 거면 젓가락으로 쪽이라도 지는 게 어떨까요?" 등등. 그간 들었던 말 중 가장 인상적인 멘트는 "머리가 하얘진다고 강경화 장관이 되는 게 아닙니다"였다. 와중에 나를 제일 압도한 건 엄마의 말. "아유, 우리 딸이 이제 할머니가 다 됐네." 네? 할머니요? 듣는 아줌마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언감생심 아가씨는 고사하고 아줌마 타이틀은 사수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추운 날씨에 이불 밖으로 꾸역꾸역 나갔다. 그리고 기왕 큰 걸음을 나선 김에 뿌염에 세팅펌까지 추가해서 이미지를 과감하게 바꿔보겠다고 별렀다.
미용실은 오전 10시에 들어가서 오후 2시에 나왔다. 그 네 시간 내내 하기 싫은 숙제를 하는 느낌이었다. 헤어디자이너는 내 나름으로 염두에 둔 이미지에 자꾸 태클을 걸었다.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 보여주면서 뒷머리가 반곱슬이라 세팅펌을 그냥 하면 컬이 이상하게 나오니 매직세팅펌을 하라고 했다. 이미 곱슬로 되어 있는 머리에 곱슬을 더하는 게 무슨 문제냐는 생각이 들어 매직세팅펌 말고 그냥 세팅펌을 하겠다고 했다. 디자이너는 그러면 베이직 말고 프리미엄으로 하라고 권했다. 베이직은 약이 독하다고 했다. 베이직이 독한 거면 사실상 프리미엄이 베이직이라는 뜻인 건가? 약제가 어떻게 다른 지 궁금했지만 왠지 혼날 것만 같아서 묻지 않았다. 프리미엄으로 해달라고 했다.
디자이너는 이어 뿌리염색은 다음에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둘을 한꺼번에 하면 헤어 손상도가 심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안 될 말이었다. 둘 중 하나만 해야 한다면 반드시 염색부터 해야 했다. 뽀글거리는 하얀 머리라니. 부의 추월차선도 아니고, 할머니행 급행열차에 타서야 되겠는가. 게다가 머리를 하겠다고 미용실에 연달아 오는 일은 도무지 못할 짓이었다. 나는 머릿결이 손상되어도 좋으니 제발 한 번에 다 해달라고 했다. 디자이너 표정이 안 좋았다. 나도 이런저런 제안과 만류에 차츰 지쳐갔다. 처음에는 손님의 머릿결을 손님 본인보다 걱정하는 디자이너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더 '이 머리가 네 머리냐' 하는 반발심이 생겼다.
미용실에서의 압권은 전신 안마의자에서 머리를 감은 것이다. 머리 감는 곳으로 이동했더니 거대한 안마의자가 놓여 있었다. 나처럼 예민한 사람에게 안마의자 위에서의 머리 감기란 고급 서비스라기보다 거의 VIP 고문에 가까웠다. 머리는 인간이 주물주물, 등허리와 엉덩이는 기계가 주물주물. 전신을 하도 주물대는 통에 제 정신이 아니었다. 나 자신을 달래기 위한 주문을 외워야 했다. '예뻐지려고 온 거야. 다 잘 될 거야. 곧 끝날 거야.' 건물 맞은편에는 사격장과 인생 네컷 가게가 있고, 윗층에는 만화방이 있음을 떠올렸다. 머리를 다 하면 그것들을 해야지. 어디 멀리 안 가더라도 이 상가 블록 안에서 재미난 것들을 다 해야지. 이윽고 디자이너가 머리를 감아둔 수건을 풀고 말리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는 생각이 바로 바꼈다. 집에 가자.
집에 돌아 오자마자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누가 나를 심하게 때린 것 같았다. 안마의자가 남긴 후유증이었다. 잠깐 잔 듯한데 시계를 보니 오후 7시였다. 어둑한 방 안에서 다시 거울을 봤다.
괜찮아, 오스칼.
빗으로 좀 빗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