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들었는데 합격했던 썰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이다. 이름만 대면 알 법한 모 기업에 경력직 최종 면접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내 앞에는 다섯 명의 임원이 한 줄로 앉아 있었다. 면접은 소위 '압박' 형태로 한 시간 가량 진행됐다.
면접관들은 나른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금세 생기와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다. 내 이력서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비영리단체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나름으로는 질문을 다양하게 변주했지만, 그들이 나로부터 알고자 하는 바는 하나였다. 한마디로 '그 비영리단체의 주요 가치나 활동 등에 반하는 상황이 우리 기업에서 펼쳐졌을 때 어떻게 처신하겠는가?'였다.
면접 초반에는 내 편에서도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유연한 자세로 근무하겠습니다. 조직 생활에 잘 적응하고 발전에 기여하겠습니다.' 면접관이 무엇을 묻든 최대한 정중하고 진지하게 답하는 것이 면접자의 기본적인 매너라고 여겨서였다. 그러나 주어진 질문에 어떻게든 답변할 때면 다섯 명의 간부는 돌아가면서 씨익 웃었다.
"고객 응대 차원에서 고급 술집에 가야 할 때가 있잖아요? 본인한테 가라고 하면 갈 수 있어요?"
"상사가 격려 차원에서 등이나 어깨를 두드리는 건 어때요? 커피 좀 갖다 달라는 건요? 아무래도 어렵겠죠?"
"본인이나 동료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 신고하거나 고발하는 성격이예요? 불의를 잘 못 참는 편인가요?"
비슷한 취지의 질문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난처함. 공교로움. 모욕감. 나는 의식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숨을 골랐다. 가운데 앉은 임원이 또 다른 질문을 던지려고 할 때, 문득 내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충분히 들었지? 이만하면 된 것 같지?‘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도 모르게 손이 가슴께로 올라갔다.
"면접관님! 저도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임원들은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면접자가 면접 도중에 면접관의 말을 자르고 질문을 한다? 면접관이 "자, 마지막으로 궁금한 점 있으면 말씀해보세요"하고 발언 기회를 주는 시간이 아닌데? 다섯 명 중 한 명이 짐짓 느긋하고 태연한 말투로 '물어보라'고 했다.
혹시 제 사상을 검증하고 싶으신가요?
적막이 흘렀다. 아무도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왜 모두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됐지?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해야겠다.
“저는 제 나름대로 뜻한 바가 있어서 그 직장을 선택했고, 다니는 동안 소임과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회 생활을 처음 시작할 수 있었던 점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다만 비영리단체의 특성 상 특정 주제에 저 자신이 매몰되는 면이 있었습니다. 제가 더 성장하기 위해서 극복할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가 역동적인 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들을 하고 싶어서 새로운 직장을 찾아 나섰고, 귀사와 귀한 인연이 닿아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 이 면접 장소에 왔습니다.
그런데 면접 내내 저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하나도 받지 못한 느낌입니다. 면접관님들이 하신 질문들이 제 역량과 인성과 향후 발전 가능성을 검증하는 데 과연 타당한 것들이었는지 의문입니다. 단지 악의적일 뿐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비영리단체에서의 업무 추진 실적에 대해 질문하신다면 성심껏 답하겠지만, 면접이 이 같은 방식으로만 계속 된다면 저는 여기서 그만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정법으로 하신 말씀들이 만약 귀사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다면, 제가 귀사와 같이 일했을 때 적응할 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는 지금부터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같이 하기 어렵겠습니다.“
허허. 허허허. 임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와중에 끝자리에 앉은 사람 한 명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응시가 워낙 강렬해서 나도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어쨌거나 끝이었다. 위풍당당하게, 기세등등하게 말아 먹었다. 나는 다섯 명 모두에게 한 번씩 눈길을 준 뒤 허리 숙여 인사하고 면접장을 빠져 나왔다. 이따위 회사는 얼마 못 가 망할 거다, 이쪽 방향으로는 오줌도 안 눌 거다, 속으로 침을 퉤퉤 뱉었다.
그런데 광역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할 때쯤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그 회사였다. 전화를 건 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오늘 면접에서 여러모로 불편하게 한 점을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했다. 아, 네. 아닙니다. 어차피 안 볼 사이에 뭐한다고 구질구질하게 사과까지 하나 싶던 순간, 다음 말이 끈적끈적 이어졌다.
“00씨와 정말 같이 일하고 싶은데 의향이 있을까요?”
그럴 리가. 피차간에 볼 장 다 본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저는 의향이 없습니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인재 만나세요.” 전화를 끊으면서 나는 그 회사의 명복을, 아니 무운을 빌었다.
그나저나 그 때 나한테 전화한 사람, 누구였을까? 모르긴 몰라도 중간이 아니라 끝에 있던, 나를 빤히 관찰한 사람이었다고 짐작한다. 게다가 그 회사는 도대체 왜 면접이 끝나자마자 나를 합격시켰을까? 내가 회사를 어딘가에 바로 신고해버릴 것 같은 기세여서 쫄아버린 것일까? 알 수 없다. 여튼, 오늘의 글에서 건질 만한 면접 팁이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한다.
의사 결정권자는 의외로 가생이에 앉아 있을 수 있으니 그 편을 잘 공략해보라는 것.
품위는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약자에게는 폭력이라는 자원이 없다. (...) 내 억울함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러면서 세상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글쓰기다.
-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 p.14
(...) 글을 쓰는 네 가지 이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 ‘미학적 열정’, 역사에 무엇인가 남기려는 의지, (좋은) 정치적 목적. 나는 모두 아니다. 나는 승부욕이다. “말로든 글로든,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는 맙시다.” 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글을 쓰는데.
- 같은 책 p.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