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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위조와 융통성의 문제

by 반야

나는 대한민국의 행정직 공무원이다. 기초자치단체에서 일하다가 현재 광역에서 근무 중이다. 공무원을 직업으로 삼은 지는 10년 차가 되었다. 공무원 이전에는 이러저러한 사기업 등에서 9년 여 일했다. 이는 내가 사회 구성원으로 어엿하게 살아온 시간의 절반은 공무원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지난 10년 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지금 공무원인 사람은 공무원 아닌 그 무엇으로도 해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지금 공무원인 사람은 그의 과거부터 미래까지 '공무원적'인 어떤 것으로써만 풀이된다. 공무원 집단은 강력하고도 지울 수 없는 공통 속성을 공유하는 일종의 혈족이며, 공무원의 행위란 그 속성의 필연적인 발현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공무원의 전형(스테레오타입)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한결 같은 스타일로 묘사된다. 이 프레임에 대해 나는 여러 모순되고 복합적인 생각과 감정을 지니고 있다.


나는 공공 기관에 가면 반드시 싸움을 벌인다. 아니, 공공 기관 현관부터 시비 거는 태도로 들어간다. 언젠가 시청에 무슨 증명서를 떼러 갔는데 위임장이 없으면 안 된다고 거절당한 적이 있다.

"위임장 종이를 어딘가에서 파나요?" "아뇨, 아무 종이라도 괜찮습니다." "인감도장 찍어야 하나요?" "아뇨, 아무 도장이나 괜찮습니다." "그럼 내가 여기서 써도 되나요?" "아니요, 그건 안 됩니다." "그럼 안 보이는 데서 쓰면 괜찮나요?" "괜찮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는 배알이 꼴렸다. "그럼 지금부터 저 기둥 뒤에서 쓸 거예요." "좋습니다." 좋다니? 나는 기둥 뒤에서 위임장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여기, 위임장이요." "네, 접수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쨌든 접수됐으니까. 하지만 기어코 한마디 던지는 나.

"필적감정 같은 거 해요?" "아니요." "그럼 다른 사람이 나인 척해도 증명서 뗄 수 있는 거잖아요." "......여기 원칙이니까요." "위임장 같은 건 있든 없든 마찬가지잖아요." "원칙이니까요."

- <사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p.80~81


좋아하는 작가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를 읽다가 유독 위의 페이지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에세이를 한 편 한 편 읽던 도중, 인용한 대목이 나를 쿡 찔렀다. 아...공포의 위임장...일본의 어느 시청에서 사노 요코가 민원인으로 겪은 일이, 한국의 어느 행정복지센터에서 내가 공무원으로 겪었던 일을 소환했다.


나는 공무원 생활에서 행정복지센터만큼 혼란스러운 질문에 시달린 적은 없었다. 민원인이라는 자격으로 내 앞에 등장한 어떤 낯설고 무례한 타인들(악성 민원인들)은, 한 명의 입체적인 인간이자 건실한 직업 윤리를 지닌 채 살아가는 나로 하여금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의식을 갖게 했다. 그들은 공무원에게 원죄가 있는 양, "네 죄를 네가 알렷다"의 심판자적 태도로, 마치 그들의 '세금'에 공무원의 인격을 마음껏 모독할 권리가 포함되어 있는 듯 함부로 굴었다. 그러한 폭력은 아무 개연성 없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사무가 어떠한 이유로든 막혀 한 번에 처리되지 않았을 때 발생했다.


위의 이야기와 관련한 나의 일화는 저 일본의 시청 공무원과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나는 민원인에게 "위임장을 안 보이는 데서 쓰면 괜찮다"거나 "기둥 뒤에서 써도 좋다"는 식으로 위법 행위를 묵인하거나 독려하기는커녕, 민원인이 내가 안 보고 있을 거라 여기고 기둥 뒤에서 위임장을 써서 내밀었을 때 접수하지 않았다가 한바탕 고함과 욕설을 들은 경험이 있다.


"민원인이 겨우 귀한 시간 내서 방문했으면 말이야, 상대방한테 사전에 다 위임 받고 왔는데 그까짓 위임장 좀 대신 쓴 것 가지고 처리를 못하겠다고? 위조해서 문제 생기면 당신이 책임지는 거야? 공무원이라 융통성은 아주 쥐꼬리만큼도 없지? 아이, xx, 진짜 답답하네. 시간 없다고! 하라면 그냥 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 앞에서 생각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어 질문이 어김없이 차올랐다.


‘위임 당사자의 서명 혹은 날인을 위조한 사실이 명백하여 서류 접수를 거부할 경우, 나는 왜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하는가? 혹은 왜 '공무원은 융통성이 없다'는 평가를 들어야 하는가?’


그가 퍼붓는 말들은 내게 부조리하고 부당한 비난으로 여겨졌다. 생각의 회로는 이랬다. 첫째, 민원인은 위임의 요건을 갖추지 않은 채 위임에 의한 사무를 처리하려 했다. 둘째, 위임장에 기재되는 서명 내지 날인은 위임 당사자의 것이어야만 하고, 타인이 대신 했을 경우 위조에 따른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셋째, 위법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수리하는 것은 공무원의 재량 행위라 할 수 없다.(물론 그는 일체의 발언권도 허하지 않았다.)


그 결과 "죄송하지만 발급이 어렵습니다"라는 말로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대충 눈 감지 않고 원리원칙에 따라 일한 죄가 추가되었다. 나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도 신상이 편하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게 정말로 맞는 건가? 그렇게 하면 유연하고 유능한 공무원이 되는 건가? 하긴 저 일본의 공무원이 대충 눈 감고 업무를 처리했음에도 민원인에게 까칠한 평가를 받는 걸 미루어 보면, 이러나 저러나 공무원은 구제불능의 직종 종사자로 폄하될 확률이 높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우리가 통상 강조하는 준법 정신은 왜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되어야 하는 걸까? 공무원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민원인은 편의에 따라 지키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 나는 그런 이중 잣대가 사회에 매우 유해하다고 생각한다. 광역으로 적을 옮긴 이후 더는 행정복지센터에서 일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때의 여러 일들을 떠올리면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신이 만약 공무원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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