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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May 25. 2024

잊히고 사라지는 전통에서 포착한 ‘정신성’

석기자미술관(56) 정명식 사진전 <유불(儒佛)>

코로나 유행이 한창이던 2020년 가을, 창덕궁 후원 연경당에서 정명식 작가를 인터뷰한 기억이 난다. 정명식은 14년 차 궁궐 목수다. 건물 지붕에 올라가 깨지고 갈라진 곳을 수리하고 나면 마지막 작업은 늘 사진을 찍는 일이다. 궁궐 건물 지붕에서 바라본 풍경은 그렇게 탄생했다. 루프탑 뷰(Rooftop View).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본 적 없는 정명식만의 시점이었다.     


궁궐 목수의 사진에 포착된 뜻밖의 비경’ (2020.11.07.)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043063     



우리는 감히 꿈꿀 수조차 없는 종묘 정전 지붕에 올라설 수 있는 건 궁궐 목수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다. 하지만 지붕 위에서 무엇을 보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목수이자 사진가인 정명식은 지붕 위에서 무엇을 봤을까. 궁궐 지붕에 올라갈 일이 없는 나는 그게 가장 궁금했다. 그때 정명식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붕 위에 올라가서 전망을 보면 옛 어른들의 생각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옛 어른들이 그래서 그 자리에 건물을 앉혔구나어떻게 보면 제가 건물만 찍던 사진가에서 건축물을 바라보게 되는 사진가로 그때 조금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다. 단순히 건물의 아름다움을 본 것이 아니었다. 궁궐 구석구석을 숱하게 다니고 오르내리면서 정명식은 선조들의 마음, 생각, 정신에 가 닿고자 했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했다. 그래서 시작한 작업이 이번 개인전을 통해 처음 선보이는 종묘대제와 제관들의 모습이다. 작가의 작업노트를 읽어보자.    

 

카메라로 보이지 않는 의식을 포착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지만전통적인 의례를 사진으로 담고자 했습니다이미 많은 부분이 현대화된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결과로 사라지거나희석되고재현된 전통을 접하며 어디까지가 우리의 의식이고 사상인지 알기 어렵습니다현대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한국 사회 속에서 전통은 사라지거나 변형되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정체성과 문화적 유산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을 던집니다.”     



카메라로 ‘보이지 않는 의식’을 포착하는 것이 바로 정명식이 추구하는 작업의 목적이자 지향점이다. 정명식의 사진이 대부분 기록성과 예술성을 모두 지니면서도 궁극적으로 그 두 가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정명식은 잘 찍은 사진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보는 이들이 무릎을 치며 감탄할 만한 사진을 찍으려는 것도 아니다.     


다비(茶毘) #5, 75×44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한지, 2019

   

이번 전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적명 스님의 다비 장면이다. 다비(茶毘)는 시신을 불에 태우는 불교의 장례 방식이다. 대목수로서 궁궐뿐만 아니라 전국의 전통 사찰을 수리 보수해오면서 정명식 작가는 이렇게 우리의 전통과 역사의 기저에 흐르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작업을 해왔다. 다시 작가노트를 읽어보자.   

  

오늘날에도 여전히 24절기세시풍속관혼상제를 달력에 표시하고 지키며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잊혀지고 있는 가치들을 일깨워줍니다한국의 전통적인 유교불교 사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오랜 역사 속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존재로서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구례 화엄사


정명식 작가는 천성적으로 자신을 꾸미거나 과시하는 부류와는 거리가 한참 먼 사람이다. 그런 성정은 사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명식은 궁궐 목수 사진가이지 사진 찍는 목수가 아니다. 이 두 가지 정체성 사이에서 정명식은 겸허하다. 목수 일보다 사진 작업을 우선시하는 법도 없고, 일을 핑계로 사진 작업에 소홀하지도 않다. 그 점을 분명히 이해할 때 비로소 정명식의 사진이 갖는 특별함이 보인다.     


달집 태우는 유림, 당진 기지시, 2023

     

이번 전시는 우리 전통문화의 뿌리를 이루는 유교(儒敎)와 불교(佛敎)를 중심으로 한 작품 3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그동안 작가가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층고가 꽤 높아 쾌적한 공간에 맞춰 입구의 두 작품 <다비>와 <일승의 끈>은 인화지 9장을 연결하는 색다른 방식으로 선보인다.     


  

정명식의 사진이 담고자 하는 것은 ‘정신성’이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 하나하나에 작가 정명식의 오랜 고민과 노력의 흔적이 오롯이 담겼다.     


전시 정보

제목정명식 사진전 <유불(儒佛)>

기간: 2024년 6월 2()까지

장소: J94 갤러리 (서울시 마포구 잔다리로 94)

문의: 02-335-1077     


<일승의 끈>, 110×6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서산 부석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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