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55) 김덕용 개인전 <生-빛과 결>
화양연화(花樣年華). 영화 제목 덕분에 유명해진 이 말은 ‘꽃다웠던 시절’을 뜻한다. 내 삶에서 꽃다웠던 시절은 언제였던가. 해지는 줄도 모르고 동네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며 마음껏 뛰어놀던 때를 떠올린다. 저녁 밥때가 되면 멀리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그만 놀고 얼른 들어와서 씻고 밥 먹어야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젊었던 엄마의 꽃다웠던 시절.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때가 더 생각난다.
그리움. 사람은 그리움을 먹고 산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이 그립고 친구들과 뛰놀던 골목이 그립다. 밤새 내린 비에 떨어진 벚꽃잎이 융단처럼 깔린 등굣길이 그립고, 가재 개구리 도롱뇽 잡으러 다니던 집 앞 냇가가 그립다. 집에서 기르다가 도저히 감당이 안 돼 개장수에게 팔아버린 똥개 복실이가 그립고, 밤이면 집에서 따로 떨어진 화장실에 가는 게 무서운 내 오줌을 받아준 요강이 그립다.
추억.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에 더 애틋한 그 시절 추억은 지금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다시 불러올 순 없지만, 영영 변하지 않을 기억. 켜켜이 쌓인 기억을 안고 끊임없이 그리워하며 살아가게끔 운명 지어진 존재. 삶이란 그런 게 아닐까.
김덕용 작가가 새 연작에 붙인 제목은 화양연화. 내 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다. 제목을 알고 작품을 보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나무판 위에 자개로 그린 반짝이는 동그라미는 구슬이다. 어린 시절 가장 즐거웠던 놀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구슬치기였다. 무더웠던 여름날 시골 외갓집 냇가에서 비눗물 타서 후후 불어 만들던 비눗방울이다. 형형색색 동그라미의 색감이 비눗방울 표면의 영롱한 빛깔을 닮았다.
사탕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떠올린 것은 사탕이었다. 구슬도 좋고, 비눗방울도 좋고, 사탕이어도 좋다. 나무판 위에서 반짝이는 저 동그라미의 형상은 작가의 어린 시절 추억에 가닿아 있다. 그러면서 감상하는 이의 기억을 소환한다. 구슬 하나, 비눗방울 하나에도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절, 나의 세계는 그 자체로 끝없이 펼쳐진 우주였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밤하늘을 수놓았던 별들. 반짝이는 동그라미는 밤하늘의 별이다.
김덕용 작가의 ‘화양연화’ 연작이 갤러리나우에서 열리는 개인전 <生-빛과 결>에서 처음으로 공개된다. 최근 들어 김덕용의 작업을 비슷하게 흉내 내 만든 유사품이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단다. 한마디로 어림없는 일이다. 나무에서 시작해 자개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가다듬고 숙성시켜온 작가의 예술 세계를 껍데기만 취하는 꼴이다. 거기에 무슨 깊이가 있겠는가. 미술평론가 안현정은 이렇게 평가했다.
“최근 작가의 여러 작업을 혼성모방한 사례들이 적잖이 목도되지만, 김덕용의 작품을 눈여겨본 이라면 한국적 세계관과 완성도에서 모방하기 어려운 ‘최고 기량과 곰삭듯 녹아든 미감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타고 남은 재가 그림이 되다…다시 피어나는 ‘생명의 빛’ (KBS 뉴스9 2023.04.17.)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653776
2023년 4월 이화익갤러리 전시에서 인터뷰한 뒤로 1년여 만에 작가를 다시 만났다. 작가의 예술적 지향점은 ‘한국적인 것’ 그리고 ‘따뜻한 작품’이다. 그 둘이 하나를 이룬 것이 김덕용의 예술이다. 뜻하지 않은 시대적 혼란 속에서 숱한 불안과 두려움, 아픔의 시간을 지나야 했던 젊은 미술학도는 훗날 자기 예술의 목표를 분명하게 정했다. 내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따뜻함과 편안함을 주자. 그런 마음의 결이 빛으로 반짝이며 환해지는 삶.
김덕용의 작품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