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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May 23. 2024

우리나라 부채 그림의 역사와 미학

석기자미술관(54) 이인숙 <선면화의 세계>(눌와, 2024)

 

대구의 미술사학자 이인숙의 <선면화의 세계>는 우리나라 부채 그림을 다룬 책이다. 부채 그림은 미술의 역사에서 주인공으로 대접받은 적이 없다. 늘 가까이 두고 쓰는 일상의 물건에도 근사한 그림을 그려 넣을 줄 알았던 옛사람들에게 부채는 한여름 무더위를 잠시나마 씻을 수 있는 바람을 일으켜주는 고마운 물건이었다. 하지만 에어컨과 선풍기가 흔한 지금은 부채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책장을 넘기면서 적잖이 놀랐다. 부채 그림의 역사가 이토록 유구한지도, 부채 그림에 그리도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숨어 있는 줄도 몰랐다. 저자는 부채의 내력에서 출발해 우리 부채 그림의 대표작을 분야별로 소개하고, 부채를 그린 옛 그림은 물론 중국인과 일본인이 남겨놓은 부채 그림까지 속속들이 조사해 책으로 묶었다. 연구자의 노고가 갈피 갈피에 고스란히 녹아든, 근래 보기 드문 훌륭한 미술책이다.     


저자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큰 것은 숭고하지만 작은 것은 아름답고 절절하다. 저자의 이 말에 십분 공감하며 책에서 만난 여러 ‘최초’들을 내나름대로 정리해보았다.     


Q.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부채 그림은?     



17세기에 활동한 왕족 출신 화가 이징(李澄, 1581~1674?)의 작품으로 전하는 <금니 산수>가 현재 전해지는 우리나라 부채 그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는다. 바탕이 짙은 파랑이라는 점 자체부터 희귀한 데다 당시 아주 값비싼 재료였던 금니(金泥), 즉 금가루를 아교에 개어 그린 고급스러운 부채 그림이다.   

  

갈대와 소나무가 자라는 언덕 옆으로 배 한 척이 물 위에 떠 있는 장면을 그렸다. 이징의 호(號)인 허주(虛舟) 두 글자를 적고 완산이징(完山李澄)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완산은 지금의 전주이니 전주 이씨라는 뜻이다.     

Q. 서울의 전경을 담은 최초의 그림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부채 그림 <소의문망도성도(昭義門望都城圖)>다. 부채에서 그림을 떼어내 화첩으로 꾸몄다. 그림 안에는 글씨도 없고 서명이나 인장도 없다. 그림 밖에 강세황, 김희성, 김윤겸 세 사람의 감상이 적혀 있다.      


소의문(昭義門)은 서소문(西小門)이니, 서소문 밖에서 보이는 한양 전경을 담은 그림이다. 오른쪽 위에 보이는 강세황의 글은 이런 내용이다. “소의문 밖에서 도성을 바라보면 곧 이와 같다. 성지와 궁궐을 또렷하게 가리킬 수 있다. 이 옹(정선)의 진경도를 마땅히 첫째로 꼽아야 한다.” 한양 전경을 그린 최초의 실경산수화이자 겸재의 유일한 한양전도로 평가된다.     


Q. 부채 그림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화가는?     


겸재 정선이 30여 점으로 가장 많다. 능호관 이인상의 부채 그림도 20점 넘게 전한다.     


Q.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부채 초상화는?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으로 정조의 초상화를 그린 한종유(韓宗裕, 1737~?)의 <강세황 선면 69세 상>이다. 부채에 살아 있는 인물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 자체만으로 극히 희귀하다. 아니나 다를까 화면 왼쪽 글씨에 단서가 있다. “신축년(1781년) 9월 11일 내가 오용도사 감동관으로 규장각에 갔을 때 화사 한종유에게 나의 작은 초상을 부채에 그리게 했는데 제법 비슷하다. 돌아와 서(庶) 손자 이대에게 준다.”     


강세황은 조선 화가 가운데 자화상을 가장 많이 그렸고, 자화상을 포함한 초상화도 조선 화가 가운데 가장 많은 12점이 전한다. 심지어 부채 초상화까지 전하는 걸 보면 역시 강세황이로구나 싶다. 이것도 집안 내력인지 정확히 5년 뒤에 당시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이명기가 강세황의 손자 강이천의 18살 모습을 그린 부채 초상화가 전한다.     


Q. 복수의 화가가 합작한 유일무이한 부채 그림은?     



강세황과 허필이 반반씩 그려 완성한 <산수>다. 왼쪽 그림이 허필, 오른쪽 그림이 강세황의 것이다. 인장은 없고 각각의 호(號)를 적은 묵서가 있다. 사이좋게 화폭을 반씩 나눠 그렸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각별한 교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글씨와 그림으로 합작한 부채 그림은 남아 전하는 것이 있지만, 그림으로 합작한 부채 그림은 이 작품이 현재로선 유일하다.     


Q. 글자가 가장 많은 부채 그림은?     



제자인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고, 스승인 강세황이 글씨를 쓴 합작 부채 그림 <서원아집도>다. 서원아집(西園雅集)이란 중국 송나라 때 학자 왕진경(王晋卿, 1036~1093 이후)이 서원의 동산에서 친구인 소동파(蘇東坡)를 비롯해 당시 명성 높은 유학자, 승려, 도사들을 초대한 모임을 뜻한다. 모임에 참가한 화가 이공린(李公麟)이 그린 그림이 바로 <서원아집도>다. 이후 중국에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그려졌다.     


화면 왼쪽 위 여백에 가지런히 줄을 맞춰 520여 자를 빼곡하게 적어 부챗살이 펴지는 방향성과 결을 맞춘 독특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이보다 글자가 더 많은 부채 그림이 없다. 게다가 등장인물만도 21명이나 된다. 아마도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부채 그림이 아닌가 싶다.     


Q. 부채 그림이 남아 전하는 최초의 여성 화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李方子, 1901~1989)의 <홍백매>다. 이방자는 원래 일본인으로 처음 이름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였다. 일본 왕족 가문 출신으로 1920년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과 결혼했다. 당시 나이 스물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재일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살다가 1963년에야 한국에 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방자는 남편의 조국에 봉사하는 삶을 살다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8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왼쪽에서 살포시 고개를 내민 홍매화와 화면 전체로 가지를 뻗은 백매화를 한 화면에 함께 그렸다. 묵서는 방자를 쓰고, 인장은 이방자를 찍었다. 생전에 이방자가 그린 매화 그림이 여럿 남아 전하는 것은 봉사활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 살뜰한 마음을 보여주는 단아하고 아름다움 그림이다.     


Q. 조선 화가와 일본 화가가 합작한 부채 그림은?     



1901년 일본 도쿄에서 만난 조선 화가 황철과 일본 화가 요시츠구 하이잔의 합작도다. 한 부채의 앞면과 뒷면에 각각 그림을 그린 독특한 형식이다. 황철의 그림은 산수화 <한림귀아(寒林歸雅)>, 요시츠구 하이잔의 그림은 화훼도 <비파와 불수화>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합작도로 이보다 앞선 시기의 작품이 있는지 궁금하다. 요시츠구 하이잔에 관해서는 다소 엽기적인 일화가 남아 있어 책 내용을 그대로 옮겨온다.     


“요시츠구 하이잔은 규슈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 출신의 시인이자 화가로 한쪽 팔이 없는 장애인이었다. 26세 때 사고로 오른팔을 절단한 그는 독비옹(獨臂翁), 독장거사(獨掌居士), 좌수배산(左手拝山) 등으로 서명하며 왼손뿐임을 나타냈다.     


그런데 그는 사고를 당한 후 자신의 몸에서 분리된 오른팔에서 팔뚝뼈를 발라내 붓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신체였던 뼈를 붓대로 삼아 붓털을 맨 으스스하고 기괴한 골필(骨筆)이다. 요시츠구 하이잔은 이 뼈 붓을 가지고 각지를 여행하며 그림을 그려 유명해졌다.”     


Q. 나란히 부채 그림을 남긴 최초의 부부 화가는?     



김기창과 박래현이다. 김기창의 부채 그림 <목동>은 제목 그대로 두 소년이 소를 타고 소나무 숲을 지나는 모습을 그렸다. 묵서를 통해 김기창이 46살이던 1958년에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오른쪽에 호 운보(雲甫)를 적고 김기창인을 찍었다. 박래현의 부채 그림 <화조>는 매화 가지에 앉은 새의 뒷모습을 그린 색다른 구도가 특징이다. 래현(崍賢)이라 쓰고, 인장도 래현을 찍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와서 그림을 배운 일본인 화가 가토 쇼린의 <인왕산 소견>이라는 부채 그림도 주목된다. 보자마자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미술사가 황정수 선생의 저서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이숲, 2018)에 처음으로 소개된 귀한 작품이다. 한국에 와서 화가가 된 남다른 이력을 가진 가토 쇼린은 한반도 곳곳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고, 식민지 시대가 끝난 뒤에도 한국과 인연을 이어가며 두 나라의 우호에 힘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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