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06)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
천경자 탄생 100주년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간다. 유감스럽다. 100주년이 얼마나 좋은 핑곗거리인가. 그런데도 천경자라는 예술가의 업적에 걸맞은 회고전 하나 없다. 그나마 서울시립미술관이 여는 이 전시가 유일하다고 하겠는데, 전시장을 돌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전시실 두 곳 모두 천경자의 작품으로 시작한다. 아는 사람은 알리라. 할 말은 많지만, 그냥 참기로 한다. 천경자의 그림을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2년 6월, 정부가 화가 10명을 선발해 베트남에 보냈다. 당시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이던 이마동을 단장으로 김기창, 김원, 박광진, 박서보, 박영선, 오승우, 임직순, 장두건, 천경자까지 화가 10명이 20여 일 동안 베트남에 머물며 종군 기록화를 그렸다. 이때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참여한 천경자는 베트남에서 돌아온 뒤 현지에서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170호짜리 <꽃과 병사와 포성>과 150호짜리 <목적> 두 점을 그려 정부로부터 200만 원을 받았다. 당시로썬 꽤 큰 돈이었다. 천경자는 이 돈으로 경제적 곤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72년 이후 줄곧 국방부 청사에 걸렸던 천경자의 베트남 전쟁 기록화 <꽃과 병사와 포성>이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됐다.
더불어 천경자가 베트남 현지에서 종이에 수채물감과 잉크로 그린 스케치 6점도 함께 걸렸다. 전장이었으니 충분히 시간을 두고 그릴 여유는 당연히 없었을 거다. 속필의 흔적이 역력한 가운데 수채물감과 잉크가 번져나간 흔적이 생생한 현장성을 보여준다. 한국 미술사를 통틀어 여성 화가가 그린 전쟁 기록화의 다른 예가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그러니 이 그림들은 히귀하다.
천경자는 열일곱 되던 1941년 4월, 일본에 건너가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들어간다. 천경자가 신입생 시절에 그린 작품 두 점이 이번 전시에 나왔다. 천경자가 일찌감치 채색화로 기울었음을 보여주는 그림들이다.
그해 여름방학에 귀국한 천경자는 외할아버지를 모델로 인물화를 그렸다. 가을학기가 되자 천경자는 학교 수업과 별도로 인물화가 고바야가와 기요시(小早川淸) 문하에 들어가 배운다. 2년 뒤인 1943년 3월 외할아버지를 모델로 그린 인물화 <조부상(祖父像)>을 스승이 속한 일본의 인물화 단체 청금회(靑衿會) 전시에 출품해 입선했다. 같은 작품으로 5월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다. 바로 그 작품이 이번 전시에 나왔다. 세로 153cm, 가로 127cm에 이르는 크기만으로도 당시 스물이 채 안 된 학생이었던 유학생 천경자의 남다른 배포를 엿보게 한다.
1945년 감격의 해방을 맞았지만, 천경자는 결혼 실패와 집안의 몰락 등으로 모진 시련에 직면했다. 스물둘, 꽃다운 나이의 천경자는 일찌감치 인생의 쓴맛을 호되게 봤다. 훗날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를 그리면서 천경자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우수와 회한이 깃든 눈동자. 꽃다움을 상징하는 장미꽃 한 송이. 그리고 머리에 쓴 뱀의 왕관. 천경자에게 뱀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 소재다. 그것은 천경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동시에 천경자를 천경자답게 만들어준 존재이기도 했다. 천경자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그림이 바로 서른 마리가 넘는 뱀을 그린 <생태>라는 작품이었다.
뱀을 그린다는 생각을 그전에 감히 누가 했던가. 천경자는 비범한 화가였다. 이 밖에도 <옷감집 나들이>(1950년대 초), <청춘의 문>(1968), <사군도>(1969), <노천명>(1973), <이탈리아 기행>(1973), <초원>(1978), <그라나다의 도서관장>(1993) 등 천경자의 귀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