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22) 서종택 <변시지 폭풍의 화가>(열화당, 2017)
과거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어떤 화가의 예술이 어느 순간 불현듯 내 가슴을 파고드는 일이 있다. 최근에는 변시지의 그림이 그렇다. 비원파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이었던 변시지의 1950, 60년대 그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변시지라는 화가가 궁금해졌다. 경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변시지의 제주 그림도 예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우선 책을 구해 읽기로 마음먹었다.
<변시지 폭풍의 화가>는 짧은 변시지 전기다. 저자 서종택 고려대 명예교수는 미술사학자가 아닌 국문학자다. 서문을 읽어 보면 화가 생전에 어떤 인연을 계기로 각별한 교분을 맺었던 것 같다. 그러니 국문학자가 화가의 생애를 쓰겠다고 마음먹었으리라. 열화당이 2000년에 초판을 내고 2017년에 개정판을 펴냈다. 학교에서 서 교수의 강의를 틀림없이 들었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변시지는 제주에서 태어나 다섯 살에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해 일본에서 성장했다. 오사카 미술학교 서양화과를 나와 당시 일본 화단의 대가였던 데라우치 만지로(寺內萬治郞)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1947년 일본 최고 권위의 미술전 광풍회(光風會) 공모전과 일본 문부성 주최의 일전(日展)에서 잇달아 입선하며 주목받았고, 1948년 제34회 광풍회전에서 역대 최연소로 최고상을 거머쥔 사건은 일본 공영방송 NHK가 뉴스로 대서특필할 정도로 엄청난 화제를 불렀다. 탄탄대로였다.
해방이 오고, 전쟁이 끝나고, 폐허에서 모든 걸 다시 일으켜 세우던 시기에 변시지는 한국 미술계의 부름에 응답해 귀국을 결심한다. 26년 만의 영구 귀국이었다. 서울대 미대를 시작으로 미포고등학교, 중앙대, 한양대를 거쳐 서라벌예대 미술과 교수를 지내며 그림을 그렸다. 비원(祕苑)이라 불린 창덕궁 후원과 종묘가 1958년에야 일반에 공개됐다. 변시지는 1960년대 들어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고궁을 찾아 그림을 그렸다. 훗날 고궁 그리기에 뜻을 같이한 손응성, 천칠봉, 이의주, 장리석 등을 아울러 ‘비원파’라 불렀다. 비원파 시절 변시지의 그림은 다른 화가들과 다른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가 특징이었고, 이 그림들은 일본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그러던 1975년 제주대학교의 초빙을 받은 변시지는 드디어 제주를 떠난 지 44년 만에 고향 제주로 귀향했다. 제주를 비원파 화풍으로 그릴 수는 없었다. 다르게 그려야 했다. 짧은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과 시행착오를 견디며 변시지는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 변시지 표 제주 그림의 세계로 묵묵히 나아갔다.
“아열대 태양 빛의 신선한 농도가 극한에 이르면 흰빛도 하얗다 못해 누릿한 황톳빛으로 승화된다. 나이 오십에 고향 주제의 품에 안기면서 섬의 척박한 역사와 수난으로 점철된 섬 사람들의 삶에 개안했을 때 나는 제주를 에워싼 바다가 전위적인 황톳빛으로 물들어감을 체험했다.”
누런 장판지 같은 바탕에 먹을 친 듯한 변시지의 그림은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서양화인 동시에 서양화라기보다는 차라리 한 폭의 동양화를 떠올리게 할 만큼 토속적이면서 한국적이었다. 그것이 바로 변시지 예술의 독보적인 면모였다.
책 뒤에 수록된 변시지의 글 <예술과 풍토, 나의 미학 아포리즘>의 한 대목은 지금의 내게 들려주는 말처럼 가슴 깊이 와닿는다.
“전시회가 많아졌다는 것과 그것을 감상하는 일 사이에는 늘 그렇게 화해로운 관계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작품을 자주 대할 수 있어서 좋지만 너무 자주 대하기 때문에 그것을 소홀히 하거나 쉽게 지나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감상의 기회가 너무 쉽게 주어지기 때문인지,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소 반복적이거나 습관적인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작가의 정열과 고뇌와 정신의 산물인 작품은 아무래도 힘들게, 고심하면서, 그리고 생각하면서 즐기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감상이다.”
이렇게 또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