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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화가’ 노은님의 그림을 만나는 시간

석기자미술관(224) 노은님 회고전 《빨간 새와 함께》

by 김석
3. [현대화랑] 노은님_포트레이트 이미지. Courtesy of the artist and Hyundai Hwarang. 현대 화랑 제공.jpg


노은님(1946~2022)은 자유의 예술가였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았고, 가식이란 것도 몰랐다. 자기를 그럴싸하게 포장할 줄도 몰랐다. 노은님은 화가와 어부가 같다고 말하곤 했다. 늘 고기가 잡히면 좋겠지만, 어떤 날은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게 어부의 삶이다. 그림도 그랬다. 그래서 노은님은 그림이 그려지면 그걸로 만족했고, 그림이 안 되면 그것대로 받아들였다.


“어부와 화가는 비슷하다. 잡힌다는 보장이 없다.”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온 정신으로 집중하는 것은 노은님의 방식이 아니었다. 문득 즉흥적으로 뭔가를 그리고 툭 던져놓았다가, 어느 날 다시 꺼내와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그리고 싶으면 그리고, 그리고 싶지 않으면 안 그렸다. 그리고 싶을 때 그렸다. 그런 자유가 없는 화가는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노은님은 생각했다.

20251014_152015.jpg 노은님, <두나무 잎사귀>, 1986, 한지에 혼합재료, 215×280cm
20251014_152342.jpg 노은님, <검정 고양이>, 1986, 종이에 아크릴릭, 181×233cm
20251014_151957.jpg 노은님, <나무 가족>, 1984, 한지에 혼합재료, 269×209cm



노은님이 그림에 서명과 함께 적은 제작 연도는 그림을 완성한 시점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다가 서명한 것도 있고, 서명 없이 완성해 놓고 나중에 서명한 것도 있다. 노은님에게 그림의 완성이란 건 없었다. 덧칠해서 또 그리고 또 그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엑스선 촬영을 해보면 보이는 그림 밑에 서너 개의 그림이 더 있고, 심지어 그림 뒷면에도 그림이 있다. 같은 그림이라도 도록마다 제목이 다르고, 연도가 다르다. 노은님은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물, 불, 흙, 그리고 공기를 만물의 근원을 이루는 네 가지 요소로 봤다. 물, 불, 공기, 흙은 생명의 4원소다. 생명은 그 네 가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순환한다. 노은님은 그 네 가지를 색으로 환원해 그렸다. 1980~90년대 그림이 그렇다. 노은님 그림의 주제는 그러므로 ‘생명’이다. 나뭇잎이 물고기가 되고, 물고기가 나뭇잎이 된다. 혹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생명은 순환한다.


20251014_151931.jpg 노은님, <빨간 새와 함께>, 1986, 한지에 혼합재료, 140.5×71cm
20251014_152103.jpg 노은님, <큰 물고기 식구들>, 1991, 한지에 혼합재료, 275×279cm
20251014_152054.jpg 노은님, <큰 물고기 하나>, 1984, 한지에 혼합재료, 286×281cm



[노은님의 일기]

한 송이 꽃을 자세히 오래 들여다보면

우주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자연은 항상 원을 만들며 계속 원점으로 들아간다.


노은님은 우리 붓으로 우리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먹을 쓴 적이 없다. 힘 있게 그릴 수 없어서였다. 노은님은 힘 있게 그리고 싶어 했다. 노은님의 그림에서 먹으로 보이는 흔적은 아크릴물감이다. 그런데 재료가 ‘먹’이라고 적힌 노은님의 그림이 있다. 틀렸다. 노은님은 평생 먹을 써본 적이 없다.


노은님은 큰 그림을 그렸다. 힘 있게 그리려면 큰 화면이 좋았다. 노은님의 그림은 전후좌우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봐도 좋고, 저렇게 봐도 된다. 예술에 무슨 정답이 있겠는가.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뒤집으면 땅으로 내려오는 사다리가 된다. 어떤 사람은 그림에서 꽃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림에서 동굴을 본다. 그린 이가 자유로웠듯 보는 이도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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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님의 일기]

난 근본적으로 인간과 동물, 식물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들 모두는 이 세상에 잠시 살다가 간다는 것과 폭력과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노은님은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면 꼭 그 나라의 박물관을 찾아가 민속품을 골똘히 관찰했다. 물, 불, 공기, 흙의 시대로부터 원시적 상상력이라는 영감을 받아들였다. <큰 물고기 하나>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에서 그런 원시적 상상력을 본다. 사실 이 그림도 위아래가 없다. 돌리면 뒤집으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된다.


노은님의 모든 그림은 자화상이다. 나무와 나뭇잎도, 물고기도, 오리도, 고양이도, 새도 노은님의 그림에선 그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생명은 순환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노은님의 그림에는 달이 많이 등장한다. 머나먼 독일 땅에서 바라본 달과 떠나온 고향에서 바라본 달은 같은 달이었다. 그래서 노은님을 달을 보며 고향을 떠올렸다. 고향을 생각하며 달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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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님의 일기]

자연에는 항상 우연과 당연이 함께 공존한다. 난 언제가 우연이고 언제가 당연인지 모른다. 어떤 우연 속에는 당연이 함께 끼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이런 일에 대한 궁금함이 없었더라면 예술을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난 내 작업을 통해 이 세상 이 모든 것을 더 알기를 원한다.


노은님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1980~90년대 회화 17점이 현대화랑에서 열리는 회고전 《빨간 새와 함께》에서 공개된다. 1982년 이후에 그려진 이 작품들은 노은님이 국내에서 전시할 목적으로 들여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어느 화랑에서 보관하다가 일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이 품어 지금까지 고이 보관해 왔다. 전시장에 걸린 노은님의 작품 17점 모두 박명자 회장의 소장품이다. 하나같이 노은님의 전성기에 탄생한 대표작이어서 귀하다. 노은님의 그림을 본 독일의 어느 아트 저널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동양의 명상과 서양의 표현주의가 만나는 다리다.”


간호보조원 출신의 동양인 여성이라는 삼중의 벽을 뚫고 눈부신 예술적 성취를 이룬 화가 노은님. 10월 18일(토)은 노은님이 세상을 떠난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다. 노은님 3주기를 추모하는 이번 전시의 의미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전시가 끝난 뒤 대표작 석 점이 노은님아카이브에 기증된다고 한다. 노은님미술관의 탄생을 기다린다.


■전시 정보

제목: 노은님 회고전 《빨간 새와 함께》

기간: 2025년 11월 23일(일)까지

장소: 현대화랑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8)

문의: 02-2287-3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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