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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근 Oct 10. 2022

[독서리뷰] 『설국』의 무상함으로부터 전이되는 피로감

『설국』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것이 4년 전이던가. 이번에 다시 만난 『설국』은 다소 피곤하게 다가왔다. 예전엔 이런 감성을 참 좋아했던 것 같은데 요즘엔 그렇지 않은 듯싶다. 자꾸만 활자가 내 안으로 스며들지 않고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애써 내 안에 담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미끄러짐 역시 그 자체로 중요한 함의이리라. 서른이 넘어가 감정의 색깔이 바래진 것일까, 혹은 단순히 삶의 피로가 증가한 까닭일까. 그리하여 이번 리뷰는 내가 느끼는 이 ‘피로 그 자체’에 집중하여 텍스트와의 관계성을 이야기하는 형태로 서술하고자 한다.




왜 피로감이 드는지 ‘책을 읽는 나’를 곱씹어보았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첫 번째 이유, 『설국』의 텍스트는 이미지 연상을 강요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앞부분에서 시마무라는 창에 비춰보이는 여인의 모습과 그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섬세하게 묘사한 후에 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덧붙이는데, 텍스트의 대부분이 이런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서술방식이야말로 『설국』의 진정한 묘미겠지만, 필자는 이 묘사 방식이 몹시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통상적으로 이미지 묘사는 독자에게 내면의 심상을 만들어주는 소설의 탁월한 미적 장치라고 하겠으나, 반대로 말하면 독자에게 ‘떠올리기의 노동을 강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소설과 소설 외의 다른 장르와의 비교해보면 더욱 강하게 와 닿는다. 이미지를 직접 응시하는 것만으로 그 속의 기호를 자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활자 텍스트인 소설은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중간 과정이 한 단계 더 추가로 삽입되어 있다. 즉 소설에 기술된 언어는 그 자체로 수신자에게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며, 나의 기억 혹은 무의식에서 조각들을 끄집어내어 가상의 이미지를 새로이 조립한다. 그러므로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한다는 것은 곧 이러한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라 하겠다. 이때 혹사되는 것은 나의 뇌이며 바로 이로부터 읽기와 연상의 피로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소설의 텍스트에 전혀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안 읽히고 집중되지 않던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의식에서 이 일련의 과정이 거부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요점은 이 『설국』의 텍스트는 전반적으로 이미지 연상의 ‘중노동’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심력을 소모시킨다는 데에 있다.



두 번째 이유, 내가 느끼는 피로는 이미지 연상의 노동에서뿐만이 아니라 작품 속에 ‘깊이 감춰짐’에서도 온다. 나의 교수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다.

텍스트는 하나의 광산이며, 대상이 깊이 감춰져 있을수록 수신자는 그것을 캐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애해야 한다.


여기서 대상은 메세지, 미적 장치, 작품 전반의 정서, 곱씹어야만 드러나는 선명한 대비감, 유려한 문체가 주는 심미적 심상(心像) 등등도 모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캐내야 할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깊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그것을 발견하고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수신자의 적극적 참여와 읽기 노동이 강제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결국 수신자에게는 그만큼의 큰 보상을 돌아오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것인데, 이 책이 그 노동을 강제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를 묻는다면 필자는 회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엄밀히 말해 필자가 보기에 『설국』은 노벨상을 수상할 만한 절대적 역량이나 힘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설국이 타 작품에 비해 탁월한 점은 '감상성(感傷性)' 그 자체와 주제로서 '삶의 무상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나, 그럼에도 빼어난 수작일지언정 인류사에 영원히 기억될 명작의 반열에 미치지 못한다고 조심스레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덧없음과 아름다움을 결부시킨 일본 문학 특유의 정서에 매료된 서구 사회의 오리엔탈리즘이 수상에 상당히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겨울아침의 눈길


마지막 세 번째 이유, 『설국』 텍스트 전반의 뉘앙스가 전해주는 덧없음 즉 ‘무상성’으로부터 오는 피로감. 결국 이 텍스트는 심미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며 그로부터 나타나는 삶의 덧없음을 이야기한다. 필자는 한때는 이 정서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이 느낌을 해체해보면 ‘삶의 무상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달하기 위한 매개적 장치로서 ‘미(美)’가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이 ‘덧없음 이데올로기’와 ‘이를 전달하기 미적 장치’가 일체화되어 고유명사화한 것이 곧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라는 일문학 특유의 정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궁극적 허무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모노노아와레에서 우리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하는 ‘미적 장치’를 소거하고 ‘무상성’ 그 자체에 대한 적극적 사유를 수행해야만 한다.


당연하지만 삶은 본래적으로 목적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무상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이 무상성을 근거로 삶 전체를 무화(無化)의 행위로 지속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제적 행위이다. 허무는 틀림없이 살아감의 이유를 소거하지만, 그 허무로 인해 현재의 삶을 내려놓을 당위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무슨 말이냐? 무상함은 곧 의미와 목적의 무(無)인 동시에 방향의 무(無)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부정성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며 그와 동시에 긍정성으로도 기울어질 가능성도 함께 가진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그러나 모더니즘 시대의 허무주의자에게는 필연적 비관으로 귀결된다는 기묘한 논리적 모순이 존재한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빠지면서도 끝내 알아차리지 못한 에피스테메의 함정이다. (즉 허무주의자들은 끝내 ‘비관적으로’ 내려놓음을 택한다는 모종의 강력한 방향성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모더니티 허무주의자들의 비관에 내재된 '방향성'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하는 질문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파악하기에, 그들이 빠진 이 함정은 삶에 주어진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전제했으며, 나아가 ‘목적의 상실’로서 삶의 실체를 파악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절망’이다. 그러나 이는 ‘선험적 전제’를 온전히 해체하지 못해서 나타난 오류이다. 즉 ‘목적의 해체’에는 성공했으나 ‘태도의 해체’에는 도달하지 못한, 이른바 절반의 허무이자 무상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무상으로부터 긍정성으로 기울어질 이유는 무엇인가? 아쉽게도 그것을 확정하는 데까지는 아직 나의 사유가 미치지는 못했다. 다만 나의 내면은 몹시 허무하지만 그 끝이 긍정성이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내 막연한 ‘기분’에 의해, 지금은 무상성 위에 올라탄 긍정성이라는 삶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왜? 내 삶의 끝에 무엇이 있든 간에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리뷰를 매듭짓고 나니, 결국 내가 느낀 피로는 그의 세계관에 대한 내 무의식의 거부였던듯 싶다.




참고문헌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민음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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