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myo Nov 05. 2021

향기가 기억하는 시간.

그리고 나는 정신과로 향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고

나무가 바람에 일렁일 때

학원에서 나오는 피아노 소리와 함께

시원한 식물과 햇살만이 내는 향기로

내 초등학교 하교할 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 내의가 살갗에 시리게 닿을 때

길이 어두워지면 작고 반짝이는 전구들이 하나둘씩 켜질 때.

그때는 얼얼하지만 그리움을 실은 공기와 섞인,

공연을 준비하던 내 겨울의 향기가 과거를 그립게 한다.


인조적이든 자연적인 특유의 향으로 인해

이전의 상황과, 추억과, 사람을 기억나게 다.

그 향을 맡기만 해도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고

현재의 순간을 기억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 기쁘면서도 아프다.


내 인생 중 가장 방황하던 시절의 편의점 핫초코와

프렌치 블랙의 어지러운 포도향은 아직도 내 머리를 아프게 하고

그를 처음 만날 때 많이 뿌렸던 겐조 향수와

그가 사주었던 수제 블랙베리 고체 향수가 아직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드디어 최근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다.

항상 회피했던 그곳, 상담센터만 다니며

'그래 나는 사실은 우울증인 척하는 바보인 거겠지, '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말씀하셨다.


"미묘 씨, 만점이시네요. 모든 부분에서 만점이세요. "

" 네? "

" 앞에서 하셨던 테스트 여러 가지 중에, 우울 불안척도 등..

모든 테스트에서 만점을 찍으셨어요. "


그리고 조금의 상담을 했는데, 역시나 나는 내 얘기를 하다가

눈물을 참다 목소리가 떨리니 의사 선생님이 긴장을 풀어도 된다 하셨고

의사 선생님은 내 얘기를 들으며 마음 아파하는 표정을 이따금씩 짓다가 말씀하셨다.


" 사실, 미묘 씨 테스트 결과를 들어오시기 전에 먼저 확인을 하는데

솔직히 의외였어요. 생각했던 이미지가 (우울해 보이는) 아니셨거든요.

그런데 지금 말씀하시다가 우시는 걸 보니까.. 마음의 상처가 많이 고인 분이신 거 같아요. "


많이 들었던 말, 나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괜찮아 보이는구나.

난 이게 연기가 습관이 된 것인지 아니면 정말 괜찮아서 그런 것인지 분간을 못한다.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는지 이젠 모르겠다.


" 말씀하셨던 증상들 들어보면, 범불안장애와 더불어 공황 증세도 있으시네요. "


약을 처음으로 받아보았다.

그래서 소량의 약을 처방해주셨고, 꾸준히 병원을 가기로 했다.

약을 먹어보니 신기하게도 우울이나 불안의 감정을 빼 버린 듯한,

로봇 부품 중에 무언가 하나가 빠진듯한 기분이 든다.

살짝은 멍한 느낌이지만 예전처럼 불안감이 급습한다거나

자살, 자해 충동은 사라진 상태다. 정말 신기한데 한 편으로는


' 아, 건강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는 거였구나? '

' 심장이 답답하다거나, 초조함 없이 살아가는 게 정상이었구나. '




오히려 어릴 때 보단 많이 나아진 내가 왜 결국은 정신과로 향했을까.

모르겠다. 원래 우울증은 내 발치에 두고 평생 가는 병이라고 하지 않나,

많이 무기력해졌다. 그래서 계속 약속을 만들고 무언가를 하려 하는데

예전과 다르게 최대한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미루고 미룬다.


도대체가 어떻게 된 인간인 건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상이 되어갔다.

무엇을 하게 되면 어떻게 그만둘지만 끝을 고민하는 나.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변하고 싶어서

억지로 밖을 나가며, 누군가를 만나며, 향기를 맡으며,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향기들을 마주하니

이 향을 처음 맡을 때에 나는 분명히 지금보다 부족한 게 많았지만

설레는 것도, 두려운 것도 많았지만 그 마저도 아름다운 인생이었다.


내가 무섭다.

갑자기 내가 잡고 있던 모든 희망의 끈을 모두 놓아버릴까 봐,

타인이 주는 현실적인 말과 상처 주는 말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그 말에 찔려 또다시 내 귀에 맴돌게 할까 봐.

지금도 사람들에게 사랑은 넘치게 받는데 그게 일시적인 것이라

또다시 상처 받을까 봐.

꿈이 있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의문과 공포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아빠와 엄마의 향기, 남자 친구의 향기,

친구들이 자주 뿌렸던 향수와 섬유유연제 향,

계절의 향, 바닷가의 짠내, 공항의 새벽 공기 냄새..


그리워하게, 그리고 또 아프게 하는 향들이

또다시 살아가게끔 '이때를 기억해.' 외쳐주는 듯싶어서

삶의 의지를 다시 한번 갖게 된다.


과거의 향기가, 앞으로도 깊게 마셔갈 향기들이

내 삶을 이루어가는 향기가 되길.


매거진의 이전글 동정과 연민은 상대를 낮춰 보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