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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홉 Apr 27. 2022

연필의 쓸모

작은 것


작은 것들은 너무 작았다. 키가 작은 나는 그런 것들에게 쉽게 마음을 빼앗겼다. 지나가던 복슬강아지, 도로에 핀 계란꽃, 직접 빚은 작은 도자기까지. 너무 사소해서 쉽게 애정을 줬다. 특히 나는 쓸모없어 보이는 연필을 아꼈다. 유년시절, 공부방에서 공부할 때마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새겨진 연필을 썼다. 좋아하는 건 닳을 때까지 쓰는 버릇이 있어서, 기다란 몸통이 짧아질 때까지 그 연필을 손에 쥐었다. 시간이 지나 고3이 되었을 땐, 뾰족한 샤프가 너무 싫어서 죽을 뻔했다. 뭉뚝한 연필은 매번 손질해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시간이 금이었던 수험생은 연필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샤프로 공부하다가 뚝-하고 심이 부러지면 참을 수 없이 답답해졌다.  


번거로워도 연필을 쓰고 싶다. 그때의 욕망은 마음속에서 계속 머물렀고, 입시가 끝난 뒤 취미였던 그림을 연필로만 그렸다. 연필을 고르고 칼로 심을 깎아 뾰족하게 만들었다. 연필로 사부작사부작하다 보면, 그림이 꼭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완성된 그림에서 연한 흑연 냄새가 났다. 손가락에는 항상 연필심 자국이 묻었다. 지저분해진 손의 흔적이 좋았다. 가끔 디지털 드로잉이 하고 싶어 지면, 연필로 그림을 그린 뒤 스캔을 해서 아이패드로 마무리했다. 그림의 완성보다는 연필로 그리는 과정을 즐겼기 때문에. 오랜 취미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방에는 원목 무늬로 둘러진 연필꽂이가 있다. 손때가  듯한 세피아  통에는 여러 종류의 연필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여행을 기념하는 연필, 나무 연필 세트, 문구점에서 급하게  연필, 선물 받은 몽당연필과 오래된 색연필까지. 출처와 신분이 불명확한 연필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우리 집에 왔다. 몽당연필만 따로 모셔두는 장식 상자도 있다.  


내가 가진 연필에는 추억과 사연이 있다. 그중 쓰이지 않은 장식 연필도 있다. 진짜 나무를 깎아서 만든 빈티지한 몸통, 위아래로는 연둣빛 끈이 돌돌 감겨 있다. 몸통 아래에는 데이지꽃이 장식되어 있고, 가운데 부분에 ‘Pai’라고 적혀 있다. 작년 여름, 홍대 빈티지카페에서 우연히 발견해서 데려왔다. 사장님에게 가격이 얼마냐고 묻자 한번 써보라고 권했다. 잠시 당황하다가 써진다고 답하니 오천 원이라고 하셨다.  들은 척하니까 웃으면서 4 원에 가져가라고 하셨고, 나는  연필을 집으로 데려올  있었다.


책을 읽을 때도 연필은 한 세트처럼 따라왔다. 매번 마음이 동하는 문장에 밑줄을 치려면, 따뜻하고 긍정적인 기운을 주는 연필이 제격이니까. 내가 읽은 책들에는 늘 검정 줄이 발자취처럼 따라왔다. 완독 후 새롭게 책을 펼쳐봤을 때, 검정 선을 따라가며 묘한 감정을 느끼는 게 즐겁다. 연필은 나의 취미를 더욱 즐겁게 해 준다. 좋아하는 행위에 늘 연필이 있지만, 그렇다고 꼭 쓸모가 있어서 좋은 건 아니다. 그저 연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족한 기분이 든다. 쓸모없음의 쓸모를 느낀다.  


흠집이 난 연필, 색이 바랜 연필, 유치한 캐릭터가 그려진 연필, 심이 약한 연필, 몽당연필까지. 저마다의 사연으로 굴러온 이 작은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필을 모을 것이다. 여행이 끝나면 연필 공방을 차리고, 수집한 세계 연필을 전시해야지. 여전히 연필을 사랑하는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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