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bracing the Absence_05 - 아르데아티네 추모 묘역
머리 위로 거대한 육면체가 부유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나를 짓눌러서 땅속 깊이 침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내 머리꼭대기 바로 위에 잠시 멈춰있습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어떤 자비로운 힘에 의해 죽음의 일시적 유예 상태에 처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은유일까요. 거대한 돌덩이와 지면의 틈사이로 날카로운 빛이 파고 들어와 335구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반지하 공간의 어둠을 날카롭게 가릅니다.
아르데아티네 추모 묘역(Mausoleo delle Fosse Ardeatine)은, 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3월 24일, 나치 무장친위대(Schutzstaffel/SS)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기념묘입니다. 연합군이 로마를 해방하기 불과 세 달 전, 나치 SS는 이곳에 335명의 민간인을 끌고 와서 동굴에 밀어넣고 한명씩 총살하였습니다. 하루 전날 파르티잔의 기습 공격에 의해 33명의 독일군 병사가 죽은 것에 대한 보복을 시행한 것입니다. 희생자들은 군인, 민간인, 귀족, 노동자, 수감자, 가톨릭 신자 및 유대인들이었으며, 14세에서 75세 사이의 남성이었습니다. 독일군들은 학살의 흔적자체를 없애기 위해서 이들의 시체를 동굴에 몰아넣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켰습니다. 학살자들의 입장에서는 희생자들의 흔적을 없애야 했습니다. 그들이 아무에게도 죽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희생자들을 물리적으로 해체하고 흙더미로 감추는 행위는, 죽은 자들을 익명의 존재로 치환하는 동시에 그들의 삶자체를 부정하는 잔혹한 행위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로마시는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고 식별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한편, 이듬해 1946년 1월에는 살해당한 이들을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한 묘역을 조성하기 위한 공모전을 개최합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11개의 프로젝트가 제출되었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4개의 프로젝트가 선발되었습니다. 같은 해 9월 주최 측은 최종적으로 마리오 피오렌티노(Mario Fiorentino) 외 3명의 건축가 및 조각가 프란체스코 코치아(Francesco Coccia)가 참여한 RISORGERE 그룹, 그리고 건축가 주세페 페르지니(Giuseppe Perugini)와 조각가 미르코 바사델라(Mirko Basaldella)가 참여한 U.G.A 그룹을 공동 1위로 선발하였습니다. 당시 각 팀의 대표 건축사였던 마리오 피오렌티오와 주세페 페루지니는 각각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비교적 어린 나이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경험은 아직 부족했으나, 잔혹한 역사에 맞서고자 하는 마음만은 뜨거웠습니다. 두 그룹은 서로 협력하여 묘역의 최종계획안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묘역 내부의 공간은 크게 세 부분-광장과 동굴, 그리고 무덤-으로 구성됩니다. 최종 계획안을 보면 사이트 자체의 지형과 맥락을 최대한 보존하고자 했던 건축가들의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트럭에 실려온 희생자들이 떠밀려 내렸던 곳은 현재 광장이 되었고, 학살의 현장인 동굴은 최대한 그대로 보존된 상태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건축가들의 적극적인 개입이 느껴지는 무덤영역조차도 장식을 최소화한 거대한 모노리스의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외부에서 보면 미동도 하지 않고 땅에 납작 붙은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파시스트 체제하에서 만들어졌던 많은 기념비들과는 대조되는, 겸손한 형상입니다. 비록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외관이지만 실제 공간에 들어서면, 엄숙함과 장엄함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묵묵하고 담담하게 비극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건축공간과 그 속에 담긴 메세지는, 긴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남깁니다.
묘역조성을 위한 토목공사는 1947년부터 시작되었고, 이를 위해 희생자의 가족과 친척들도 많이 고용되었다고 합니다. 학살로부터 5주년이 되는 1949년 3월 24일에 드디어 아르데아티네 기념묘역(Mausoleum)이 개장하였습니다. 미르코의 철문과 코치아의 동상은 1951년에 추가로 완성되어 묘역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아피아 가도(Via Appia)를 통해 묘역에 다다른 추모객들은 육중한 철문(미르코 바사델라 작)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빽빽이 얽힌 펜스에는 한 사람만 통과할 법한 작은 출입구 두 개가 나란히 있습니다. 묘역 안으로 들어가면 광장 왼편에 서있는 세명의 군상(프란체스코 코치아 작)과 만납니다. 이들은 몸통이 묶인 채로 각기 다른 방향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석상 중 하나의 시선은 광장을 가로질러 동굴의 입구에 멈춰 있습니다. 어두움을 가득 머금고 있는 동굴입니다.
입구에 놓인 광장에서 출발한 추모객들은 학살의 현장인 동굴에 들어섭니다. 피해자들이 임박한 죽음을 향해 걸어 들어갔던 바로 그 길에서 그날의 공포와 고통에 참여합니다. 나치 경찰은 한 번에 다섯 명씩 동굴에 몰아넣고 총을 겨눴으며, 335명이 모두 죽을 때까지 처형은 계속되었습니다. 오후 세시반부터 저녁까지 계속된 살육의 결과 동굴에 쌓인 주검의 높이는 수 미터에 달했습니다. 나치는 이 범죄의 현장을 은폐하기 위해 동굴에 폭약을 설치하였고, 희생자들은 수개월의 시간 동안 엄청난 무게의 돌더미에 깔린 채 동굴 속에 그대로 방치되었습니다.
그로부터 7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오늘 우리는 이 동굴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때와는 다르게 이제 동굴은 비어있고, 동굴의 벽면에는 마치 할퀸 흔적과 같은, 날카로운 생채기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당시 피해자들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 걸었던 그 길에서 우리는 그 절망과 비탄을 감히 상상해 봅니다. 보존된 현장에 고스란히 남겨진 서늘함과 공포는 그 어떤 정교한 설계에 의한 것보다 강력합니다.
어두운 동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중간중간 하늘을 향해 뚫린 빛우물과 마주치게 됩니다. 구멍을 통해서 찬란한 빛이 동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깨진 지형의 틈새로, 날 것 같은 고통이 함께 밀려들어 옵니다.
동굴의 끝에 다다르면 희생자들의 유해가 안치된 무덤으로 자연스럽게 인도됩니다. 응회암 대지를 반층정도 깎아 들어가 다진 터 위로 약 26m X 48m X 3m 크기의 거대한 모노리스(Monolith)가 무덤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이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6개의 받침돌에 의해 지면에서 살짝 떠있어서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 것은 335명의 희생자들이 공유한 역사적 비극이 함축된 하나의 거대한 묘석이기도 합니다.
무덤 내부로 들어서면 머리 위로 거대한 육면체가 부유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나를 무겁게 짓눌러서 땅속 깊이 침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내 머리꼭대기 바로 위에 잠시 멈춰있습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어떤 자비로운 힘에 의해 죽음의 일시적 유예 상태에 처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은유일까요.
가지런히 정렬된 무덤사이를 거닐어 봅니다. 이곳은 동굴보다도 한층 더 깊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동굴에서 지배적으로 느껴지는 요소가 ‘공포’였다면 이 공간에서는 ‘슬픈 탄식’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거대한 돌덩이와 지면의 틈사이로 날카로운 빛이 파고 들어와 침묵의 공간을 가릅니다.
아르데아티네의 건축공간에 새겨진 역사의 어두운 단면이 시간과 문화를 초월하여 전해집니다. 참혹한 비극의 현장에 초대된 우리들은 장소와 공간의 경험을 통해서 그날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고 깊은 슬픔을 함께 느낍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인간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자유를 얻기까지 지불한 대가들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참고문헌: Claudia Conforti, “Monument of the Ardeatine Caves: a memorable work of architecture (1944-1951)”, Casabella no. 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