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bracing the Absense_06 - 구비오
'산자의 도시'와 구축적인 틀을 일치시키는데서 출발하는 것. 이것이 죽음과 삶의 거리에 대한 건축가의 대응이었습니다.
'딩동~' 하고 벨을 누르면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문밖으로 맞으러 나올 것만 같은 현관. 하지만 이 집에는 초인종이 없습니다.
깨끗하게 정렬된 길 양옆으로 비슷한 높이의 작은 집들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고, 길모퉁이에 놓인 화분에는 잘 가꾸어진 꽃과 나무들이 심겨있습니다. 주택마다 대문 옆에는 가족의 이름을 새긴 명패가 달려 있고, 그 앞에는 흙을 털 수 있는 발판이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슬쩍 들여다본 유리창 너머에는, 가족의 개성과 취향을 반영하여 장식된 공간이 보입니다. 고풍스러운 콘솔 위에는 붉은 생화가 담긴 화병이 놓여있고, 벽에는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일렁이는 전등의 불빛이 집의 현관을 조용히 밝히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느껴지는 환대의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이 주택들의 대문은 좀처럼 열리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동네에는 사람의 기척이란 게 느껴지질 않습니다. 지나친 고요함과 적막함만이 텅 빈 거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의 차이에서 오는 위화감은, 공포영화 '비바리움(Vivarium)'에서 주인공들이 갇혀버린 마을의 서늘함과도 닮아 있습니다.
이곳은 구비오(Gubbio) 마을 어귀에 있는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입니다. '네크로폴리스'란 직역 하면, '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죽은 자를 뜻하는 nekros와 도시를 뜻하는 polis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보통 도시의 성벽 밖에 위치한 대규모 묘지를 가리키며, 도시의 주거지역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습니다.
여기에 오기 전, 다양한 묘지들을 방문했지만, 이곳처럼 '네크로폴리스'의 의미를 직설적으로 풀어낸 곳은 본 적이 없습니다. '산 자들의 도시'의 구조와 형태가 그대로 축소된 미니어처 형태로 치환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이곳에서는 '네크로폴리스'의 의미가 피상적인 레벨을 넘어 온몸에 전달됩니다. 이러한 형태적 유사성은 '죽은 자'와 '산 자'의 거리를 극단적으로 좁히려는 의도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구비오(Gubbio)는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 주에 위치한 인구 3만 명 규모의 작은 도시로 지리적으로는 이탈리아 반도의 거의 한가운데 위치한 곳입니다. 마을의 역사는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중세시대 초기 십자군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번창했던 도시입니다. 450미터 높이의 인지노 산(Monte Ingino)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의 높은 곳에 올라가면, 중세시대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적갈색 기와지붕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경치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구비오 공동묘지는 구비오의 마을 어귀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쌓여온 도시의 역사를 반영하듯, 구비오 공동묘지도 수차례 확장을 거듭하여 왔으며, 그때마다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담아서 조금씩 다른 형태의 묘지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앞서 방문했던 방사형 묘역의 서남 측에는 건축가 안드레아 드라고니(Andrea Dragoni)와 프란체스코 페스(Francesco Pes)의 설계로 1,800㎡ 규모의 묘지가 증축되었습니다. 2011년에 완공된 이 묘역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 합니다.
앞에서 소개했던 방사형(radial) 패턴의 묘역과는 대조적으로, 안드레아 드라고니가 설계한 증축 묘지는 보다 현대적인 도시 구조의 리듬이 느껴집니다. 벽감식 묘로 이루어진 선형블록들이 질서 있게, 반복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 마치 죽은 자들이 거하는 최신 아파트 단지에 방문한 느낌입니다.
바닥과 벽, 그리고 벽감식 묘 등, 이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거의 모든 요소는 트래버틴으로 균질하게 마감되었습니다. 불필요한 장식은 철저히 배제되고, 시각적 자극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습니다. 인접한 기존 묘지에서 보이는 직설법을 배제하고, 은유를 통해 죽음을 개념화하고자 하려는 건축가의 의도가 돋보입니다. 죽음의 개별성보다는 익명성을 우위에 둔 것은, 개개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숙명으로서의 죽음과 마주하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건축가는 묘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들과, 묘역을 동서로 연결하는 통로가 만나는 지점에 네 개의 광장을 두어 도시적인 느낌을 한층 강화하였습니다. 네 개의 광장은 방문객들이 쉬고 사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보이드(void)인 동시에, 콘서트나 전시회 등의 문화 이벤트가 열리기도 하는 마을의 작은 광장(community plaza)과도 같은 공공 영역입니다.
광장의 상부에 나 있는 하늘로 향해 열린 창은, 르네상스 예술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의 창(窓)과 동시대 예술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Skyspace를 재해석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방문객들의 시선은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응시하게 되며, 하늘의 것, 영적인 차원과의 교류를 통해 하늘과 땅, 삶과 죽음에 대해 사색하고 관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광장과 거리에 설치된 장소특정적(Site-specific) 예술작품은 삶과 죽음에 대해 조용히 성찰할 수 있는 순간을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찰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건축가는 유족들이 고인을 추모하며 떠오르는 슬픔의 감정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도록 돕고자 하였습니다.
답사를 마친 후, 밀라노에서 건축가 안드레아 드라고니와 만나서 대화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인들이 지닌 죽음의 개념과 그것이 장묘 건축에 미친 영향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기독교의 지배적 영향력 안에서 형성되어 온 이탈리아의 장묘문화는, 죽음을 단지 삶의 '끝'이 아닌 천국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으로 인식하도록 영향을 미쳤습니다. 죽음이 삶이 단절된 개체가 아닌 연속적 과정이라는 인식은 죽음과 관련된 공간의 조성에도 당연히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편, 이탈리아 장묘 건축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묘지와 교회의 근접성은 중대한 의미가 있는 듯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기독교 성인의 무덤 위에 세워졌고, 불과 수세기 전까지 일반인들의 무덤 역시 교회를 중심으로 그 주변부에 위치하여 교회의 관할 안에 존재해왔기에, 묘지라는 장소가 기능적으로 고립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인에게 무덤은 매장과 추모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만남과 예배, 공동체 활동을 위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장묘 관련 시설이 혐오시설로 간주되어 삶의 터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우리 사회와는 다르게, 이곳 구비오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거리(距離)가 유독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일상적으로 방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묘지가 위치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을 구성하는 물리적 재료와 형태적 어휘가 무척 닮아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건축가는 중세도시 구비오의 구조를 면밀히 탐구한 이후에 이를 묘지로 옮겨 오고자 하였습니다. 재료와 형태적인 측면에서 뿐만아니라 의미적 차원에서도 이곳에 공공적 성격을 담고자 하였습니다. 산자의 도시와 구축적인 틀을 일치시키는데서 출발하는 것. 이것이 죽음과 삶의 거리에 대한 건축가의 대응이었습니다. 그가 만들어낸 '죽은 자를 위한 새로운 풍경'에는 '산 자의 세계'로 부터 끄집어낸 익숙한 형태와 재료들이 추상적이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활용되어 두 세계 간의 거리감을 극적으로 좁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