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즈키 Aug 20. 2020

월급 못 받았을 때 생각나는 그곳

채권추심업자와 근로감독관 사이

위 사진은 본 글의 내용과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도 한 진정인에게 나도 모르게 욱했다.

"빨리 사장한테 돈 좀 받아줘봐요. 가만있지만 말고 좀 달달 좀 볶아봐요"라는 한 민원인의 짜증 섞인 말투에

나도 모르게 "근로감독관은 채권추심업자가 아닙니다."라고 외칠 뻔했다.

단지 소심하게 "저희는 강제 집행권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고.


신고사건이 접수된 지는 어느덧 한 달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사장은 배 째란 식으로 잠수를 타고 휴대폰 번호도 연락두절.

가게 번호를 배달의 민족에서 찾아내어 전화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이라곤

"내가 돈을 주든 말든 알아서 할 테니 노동청은 빠져."라며 끊어버렸던 싸가지 사장.

왠지 목소리 만으로도 살이 뒤룩뒤룩 찌고 배불뚝이에,

금목걸이를 차고 욕을 찰지게 하면서 직원들에게 갑질깨나 했을 듯한 기름지고 재수 없는 인상이었다.


조장풍처럼 양아치 사장의 멱살을 잡고 이리저리 흔든 다음에

그렇게 살면 안 되지라고 무릎을 꿇게 한 후에 가볍게 훈계를 해주고,

당당하게 강제 집행권을 행사하여 통장에 압류를 가한 다음에 민원인에게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아 주고 싶지만. 내 생에 실현 불가능한 꿈이다.


처음에는 근로감독관이 돈 받아주는 게 소임을 다하는 거라 생각했다.

'노동=돈'이 아니었던가. 월급은 그 사람의 자존심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전 어떤 팀장님이 나한테 근로감독관은 돈 받아주는 게 다가 아니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월급을 안 주는 건,

결국 사업장의 모든 것이 집약된 최종 결과물이다.


사전 예방이 중요하단 뜻이다.  근로'감독'관이란 말처럼.

하지만 현실은 감독의 업무는커녕...

채권추심업자로 취직한 것 같은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다.


우리나라와 일본만 사업장의 임금체불 사건에 공권력이 개입하여 근로감독관이 처리한다는데,

실제 신고되는 사건의 99%가 임금체불 사건이므로 감독관이 감독 역할을 하는 경우는 감독팀 말고는

거의 힘들다고 보면 된다. 사장한테 전화해서 돈 왜 안 줬냐. 돈 언제 줄 거냐.

차라리 채권추심업자들은 강제집행권한이라도 있지, 감독관은 형사 처벌한다고 압박하는 조건으로

월급을 받게 해 줄 뿐이다.


오늘도 선배 감독관님들과 커피를 마시면서 위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감독관이 사법경찰인데 아무도 우릴 경찰로 느끼지 않아."

"맞아요. 심지어 감독관이란 호칭보다 조사관님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냥 행정직 하는 공무원으로만 알고 있는 민원인들이 대부분이야."


"노동청에서 진정사건 없애고 고소사건만 하면 안 돼? 근로기준법 위반하면 무조건 형사 처벌하고,

임금채권은 따로 민사로 진행하면 사장도 함부로 법을 어기지 않고, 민원인도 근로자성에 관계없이 돈 못받으면 무조건 노동청에 신고하지는 않을 텐데."


저마다 모두 근로감독관 역할이 변해야 함은 절감하고 있었다.

외부에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근로감독관의 역할에 비해,

현실의 제약은 너무나 많다.

변화는 일어날까. 변할 수 있을까. 감독관이 정말 감독관으로서 일하는 날이.


현장에서 근로감독관들은 모두 변화를 꿈꾸고 있지만,

모르겠다. 이 현실은.

점점 내 안에선 화가 쌓여만 간다.


그리고 내일은 잠수 탄 양아치 사장을 만나러 소재수사를 간다.

달달 볶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우리는 강제 집행권도 없고, 사업주도 또 하나의 민원인이므로.


단지 근로감독관이 아직 살아있음을,

당신을 잊지 않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내일 출동할 뿐이다.


부디 살아돌아오길.

그 사장 말고.

내가.













작가의 이전글 근로감독관이 경찰일 줄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