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불리 결론 내자면, 자동차 여행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이동 자체가 여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 여행하면서 이동은 필수지, 안 그런 여행이 있냐 반문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행기에선 이동 시간 대부분을 하얀 구름만 봐야 하고, 열차 여행은 철로를 따라 맞춰진 시간에 따라 달릴 뿐 내 마음대로의 완급 조절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동의 경로를 자유로이 조정할 수 있으면서, 이동 중의 풍경의 변화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여행은 오로지 자동차 여행(도보와 자전거 여행은 별개의 카테고리 인걸로)이다.
새하얀 만년설이 덮인 이미지로 표현되는 알프스 산맥은, 그 최대 수혜지역인 스위스뿐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에 걸쳐있는 유럽의 커다란 지붕이자 시그니쳐이다. 이탈리아 북부를 통해 알프스의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그때그때마다 다른 방식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빈틈없이 초록이 채워진 산 아랫마을의 귀여운 종탑을 보다가도 갑자기 덩치 큰 산들이 자리다툼하는 광경에 시선을 빼앗긴다. 저기 멀리 산에 드리워져 있는 은빛 실들이 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초점을 맞춰보니 계곡에서 직접 쏟아져 내려오는 폭포 줄기들이다. 이 험한 지형에 누가 저렇게 암자를 지었을까 하는 중 확 트인 초원이 펼쳐지고, 저 멀리 어디서 대릉 대릉ㅡ 소 방울(워낭?) 소리가 울린다.
지루 할 틈 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덧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관통하는 Great St Bernard Tunnel을 통과한다. 스위스의 상징인 세인트 버나드 종의 개가 그려진 멋진 이정표가 여행자를 반긴다. 폭설로 인한 도로 피해를 막기 위해 설치된 덮개로 인해 뷰를 온전히 즐기진 못했지만, 쭉 뻗은 길 옆으로 지나가는 모습도 충분히 멋지다. 시간이 있다면 근처 마을에서 호수와 마터호른을 볼 수 있었겠지만, 숙소 체크인에 쫓긴 우리에겐 그런 호사는 허락되지 않는다. 터널을 지나고 점점 낮아지는 고도를 귀로 느끼며 보아뱀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타고 가파르게 산을 내려간다.
이 나라에는 놀라운 자연경관 말고도 여행자의 입을 딱 벌어지게 하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살인적인 물가.
방금 지난 터널만 해도, €27.8(CHF 29.5)의 통행료를 지불했다...(이때 깨닫지 못한 큰 실수가 있었으니, 통행료에 대한 이 안타까운 에피소드는 앞으로 쓸 예정...)
(2021년 9월 1일 기준) 원화 대비 환율이 CHF 1265원, EUR 1370.56원 임을 감안할 때 약 90%~95% 의 환율 변환을 고려한다 해도 스페인(프랑스는 체감 물가 수준이 높지 않았다) 대비 실제 체감되는 의식주 물가는 1.5-2배 정도였다. 4인 가족 기준 비슷한 수준의 숙소를 봤을 때, 스페인-프랑스의 경우 150유로를 평균으로 치고 봤다면, 스위스에선 250-300유로를 기준인 (심지어 숙소 수준은 좀 더 안 좋은...) 식이다. 먹을거리의 경우 Wasabi(초밥 도시락 등의 스낵류를 파는 식당) 같은 프랜차이즈 식당이나 고속도로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때우면 €50, 레스토랑에서 좀 배불리 먹는다 하면 €70-90 정도를 각오해얄 듯하다. (4인 가족 기준) 물론 경비를 신경 써야 하는 여행자들에게 방법은 있다! 다행히 Coop 등의 로컬 식료품점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히 식량을 조달할 수 있으니, 가능하다면 스위스에서 숙소는 간이주방이나 공용 주방을 쓸 수 있는 곳으로 정하는 것이 좋다. (물론 경비 걱정 없이 다닐 수 있는 분들은 예외)
스위스는 영구 중립국으로서 독자적인 CHF(스위스프랑)의 화폐단위를 사용하지만, EU 경제권과 불가분의 관계인지라, 스위스 내에선 유로와 스위스프랑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게다가 covid 이후의 뉴 노말로써 현금보다 카드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동네 구멍가게에서 껌 하나를 사 먹어도 카드 결제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스위스 여행을 위해선 아주 소액의 CHF만을 준비해도 될 듯하다.
이러니 저러니 불평해도 끝내주는 자연환경임은 분명하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고속도로 휴게소의 풍경도 엄지 척의 연속이다. 이 나라의 모든 것이 비싼 것은 이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인 거라 믿는다.
사실 오늘의 숙소는 레만 호수 변의 에비앙(Évian-les-bains)이다. 한 가지 비밀은, 열심히 스위스에 이러쿵저러쿵 열변을 토했지만, 사실 다시금 프랑스(!)라는 것이다. 면적 58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유럽의 두 번째로 넓은 호수 레만 호 주변은 국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호수 서쪽에 위치한 제네바(Genève)는 스위스지만, 호수의 허리께의 남쪽은 프랑스, 북쪽은 스위스로 쪼개진다. 남쪽엔 프랑스 에비앙이, 북쪽엔 스위스 로잔(Losanne)이 있는 셈. 그러다 호수 동쪽 몽트뢰(Montreux)부턴 온전히 스위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제네바-에비앙-몽트뢰-로잔 은 각각 한 시간 정도의 거리로 떨어져 있다. 살인적인 스위스의 물가와는 달리, 에비앙에선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숙소를 해결할 수 있기에, 스위스를 쿨하게 지나쳐 다시 프랑스 땅으로 돌아와 짐을 풀게 된 것. 이곳을 기점으로 레만호 주변의 스위스의 도시들을 다녀오는 것이 나의 빅 픽쳐인데.
나의 그런 꼼수를 알아보기라도 한 것일까?
스위스의 자연을 즐길 거면 그에 맞게 비용을 부담하라는 자연의 분노(?)인가 싶을 정도로, 신기하게 우리가 도착할 즈음부터 폭우가 시작되었다.
아, 에비앙은 바로, 생수 이름 그 에비앙 맞다. 알프스 산의 빙하가 녹은 약수가 흘러내린다는 그 물의 도시이다. 깨끗하고 약효가 있는 물도 반갑고, 아름다운 호수도 반가운데 우린 하늘에서 내리는 물은 도저히 반가워 할 수가 없는 여행자들이다. (어디선가 비가 배어들어오는 차를 타고 있기 때문에... D+10 참조)
좁지만 깔끔히 유지되어 있는 숙소에 만족하며 최소한의 짐을 풀었다. 코코의 배변패드가 우리 짐을 잘 지켜주길 바라며, 번개가 번쩍 번쩍이는 창밖을 바라본다. 이 비엔 내 빅픽쳐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을 거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 복잡한 국경선을 따라 내 핸드폰 통신도 끊어졌다 이어졌다 혼란스럽다......
다음날, 우려보단 나은 수준으로 오후부턴 나가 볼 만한 날씨가 되었다. 게다가 배변패드가 열일 해준 덕에 차 안에 남겨 놓은 짐들도 뽀송뽀송! 찌푸린 하늘 눈치를 보며, 겨우 제네바로 향한다.
레만 호와 론 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제네바엔 그가 자랑하는 145m 높이의 대분수(Jet d’Eau)가 당당하다. 화려한 볼거리는 많지 않지만, UN 사무국을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에 빛나는 도시이다.
사실 남편 역시 작은 국제기구에서 일하기 위해 유럽으로 파견을 왔다. 사무국으로서 회원들 간의 국제적인 회의를 주최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주요 업무인데...... 판데믹 상황에서 100% 재택근무를 하며 16개월째 골방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분명 제네바의 회의 환경도 분명 이전과는 달라졌을 테지만, 그래도 남편은 가까이서 본 (정장을 쫙 빼입은) 어느 기구의 일원일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에 살짝 부러움을 느끼는 것 같다. 힘내, 남편.
레만호를 따라 산책하며 유명한 꽃시계, 제트 분수 등을 보고 론 강의 하구 쪽으로 걸어왔다. 불어난 강물이 어젯밤의 폭우가 얼마나 심했는지 보여준다. 재미있게도, ‘수면 아래 분주히 움직이는 백조의 발’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노력을 표현하는 말로 흔히 쓰는 말인데, 언뜻 그렇겠거니~ 하고 두리뭉실한 이미지로 생각했던 모습을 이곳에서 실제로 보게 되었다. 심지어 백조의 ‘하악’ 질이라니! 멋모르고 대드는 코코가 괘씸했던지, 하얗고 우아한 백조님이 겉모습을 벗어던지고 본색을 드러낸 거다. 새끼 백조들은 저만치 떨어져 아빠가 어떻게 자기들을 지켜주는지 빤히 쳐다보고 있다. 사실 백조를 공격할 의도는 전혀 없었던 여행자들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 밤 백조 아빠의 무용담이 둥지 가득히 퍼질 예정이다.
위협(?) 앞에서 우아함 따위 걷어 차 버린 아빠 백조처럼, 먹을 것 구하러 발길질하는 분주한 물갈퀴질처럼, 겉모습과 다른 이면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멋진 정장 입고 분주히 걸어가는 어떤 사람의 회의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밤을 새웠던 시간들이 들어갔을 거고, 그 사람 역시 오늘 회의 결과를 정리할 생각에 두통약을 먹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다못해 스위스 경치 구경도 결코 공짜가 아니고 말이다. 골방에서 수염도 안 깎고 일만 하는 것 같다는 남편, 당신 물갈퀴질 덕에 이렇게 길게 여행도 올 수 있는 거니, 아빠 백조보다야 더욱이 면을 좀 살려줘야겠다.
이 도시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영국 공원의 대 관람차를 탄다. 사방이 뚫려있는 오픈카형(?) 대관람차다. 주변엔 롤렉스, 파텍필립, 바쉐론... 이름만 들어본 고급 시계 브랜드들이 가득하다. 저 고급진 이면에도 분명, 백조의 물갈퀴질이......(이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