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많은 지인들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하 ‘찰.초’)을 유년시절의 추억이 담긴 작품으로 꼽는다. 난 이 작품을 영화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영화조차 올해 들어 아이들과 함께 봤으니 찰.초 세계 입문이 늦어도 한참 늦었다.
초콜릿(을 포함한 단 것)에 대해 진심인 괴짜 천재 윌리 웡카와 소년 다움을 간직한 소년 찰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모험담이 주 내용이다. 근데 너무 나이 들어 이 작품을 처음 보아서인지, ‘결국 착한 아이가 상을 받았답니다’ 식의 결론이 좀 삼삼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고백한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원래 팬이었던 사람들에게도 조금은 드는 마음인지, 최근 챙겨보는 웹툰에서 비슷한 내용이 나와서 크게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장면들은, 원작자의 상상력에 대해 감탄을 마지못하게 한다. 내겐 특히 거대 초콜릿 강과 폭포가 그랬다. 실제로는 물에 끈적함을 더해주는 식이섬유소와 갖가지 색소의 콜라보였다고 해도 말이다.
그 장면은 내게 뷔페식 샤부샤부 집에 있던 3단 초콜릿 분수를 연상시켰다. 초콜릿 빛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색을 지닌, 초콜릿 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향을 지닌 탄력 있는 액체가 퐁퐁 솟아 나와 대리석 같은 매끈함으로 퍼지는 와중 긴 꼬챙이에 꼽은 하얀 마시멜로를 가까이하면, 단단해 보이던 진갈색 표면이 좌악 갈라지는 모습에 항상 매료되곤 했다. 또, 2019년 가을, 파리 오페라 극장 앞 린트(Lindt) 초콜릿 가게를 갔을 때, 눈앞에서 매끈한 초코 액체를 에펠탑 모양의 틀에 넣어 단단히 굳히고 그 자리에서 휘리릭 이름을 써주던 쇼콜라티에 모습에 크게 감탄한 기억도 있다. 부드러움과 단단함의 경계에 있는 초콜릿은 신기하고 환상적이다.
그러나 내게 초콜릿에 관한 강렬한 인상이 남은 일은 이것이다. 몇 년 전, 다니던 회사의 지하 매장에 ‘레더라(Läderach)’라는 초콜릿 전문점이 새로 입점했다. 딱히 단 음식에 취향이 없는 난 굳이 찾아갈 일이 없었는데, 더웠던 여름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어슬렁 거리던 내게 얼음을 갈아 넣은 시원한 아이스 초코가 눈에 들어왔다. 그거나 한 잔 마셔볼까, 하고 들어서자마자 후덕한 인상의 주인분이 인사 대신 깜짝 놀랄만한 소리로 크게 외쳤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초콜릿입니다!
호기심이 생겨 보기에도 생소한, 꼭 돌조각 더미 같은 판 초콜릿 몇 개를 주문했다.
아, 정말, 맛있다.
무거워 보이는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 가볍게 녹고, 그 안에서 얼음 같이 보사지는 견과류나 누가 조각이 맛을 더한다. ‘단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초콜릿에 이렇게 다양한 맛이 함께 할 수 있을 줄이야. 맛과 질감에 ‘반전’이 숨어있는 초콜릿이랄까. 그 후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초콜릿으로 각인된 레더라, 를 본고장 스위스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스위스 초콜릿 이야기에서 또블레론(Tobleron)을 빼놓을 수 없다. 삼각기둥 모양의 초콜릿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선 특이하게 ‘스프레드형 초콜릿’으로도 이 브랜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아마 다른 나라에선 ‘악마의 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독일의 누텔라(Nutela)가 발라먹는 쵸코의 고유명사 격 존재일 텐데 말이다. 또블레론 크레페를 굽는 아저씨의 손놀림!
그럼 스위스 초콜릿은 왜 유명해졌을까? 요리의 80프로는 재료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밀크’ 초콜릿은 신선한 우유를 생산하는 스위스에서 발달할 수 있었다.
거기에 기술력도 뺄 수 없는 요소다. 스위스 브베에 최초의 초콜릿 공장을 지은 프랑수와 루이 카이에(Francois Louis Cailler)를 시작으로, 혀에서 녹는 초콜릿을 처음으로 만들기 성공한 세계적인 초콜릿 브랜드 린트사(Lindt)가 있었고 위에서 얘기한 레더라(Läderach)는 ‘속이 빈 초콜릿 특허’를 보유한 스위스 기업이다. 이에 마터호른을 형상화 한 초콜릿으로 유명한 타블러(Tobler-Tobleron의 기업)등의 마케팅 성공으로 지금의 스위스 초콜릿이 만들어졌다.
(스위스 정부 관광청 블로그 참조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swissfriends&logNo=70080208709)
첫날 예상했던 대로, 에비앙에서 묵는 이틀의 일정에 로잔, 몽트뢰를 전부 다 둘러보는 것은 욕심이었다. 일단, 날씨가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폭우로 엄청나게 유량이 불어난 레만호에서 보트를 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평소에도 배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행의 매력은 생각지 못한 반전 아닐까. 우리에겐 천천히 에비앙 르 뱅(Evian-les-Bains)을 둘러볼 시간이 생긴 것이다.
신장 결석을 않던 프랑스의 레쎄르 후작은 요양을 위해 1790년 에비앙 지방에 사는 그의 친구 까샤(Cachat)를 방문했다. 그동안 그의 소유의 샘물(에비앙 물)을 매일 마셨는데 몇 개월이 지나자 마법같이 자신의 신장결석이 치료됐다고 한다. 그 후 이 이야기가 소문나며 이 작은 마을에 병을 고치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가 에비앙 생수의 기원이다.
무료로 운행되는 푸니쿨라(Funiculaire, 급경사면에 설치된 도르래 방식으로 움직이는 철도)를 타고 에비앙의 명소 Buvette Cachat 등을 돌아보자. 종점까지 올라가면 레만 호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여행 마지막 날까지 찌푸리던가 눈물을 흘리는 날씨가 참으로 야속하다. 하지만 우연히 레만 호수 주변에서 발견한 피카소의 한마디에 맘을 달래 본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있는 그대로 이 시간을 즐길 것. 혹시 그게 맘에 안 들더라도.
어떤 점심을 먹고 떠나야 잘 먹었다는 칭찬을 들을까 고민하다 퐁듀를 선택했다. (참고로 퐁듀는 남편에게는 인생 처음이자, 내겐 십 수년 전 여행 도중 친구의 생일 때 큰맘 먹고 사 먹었다 실망하고 다시 안 먹은 음식 되겠다.) 프랑스에서 전통 퐁듀를 꼭 먹고 싶었다는 남편의 강한 의지 덕이었다.
다행히 옛 기억과 달리 꼬리한 치즈에 푹 담가 먹는 이 맛이 입에 착 감긴다. 입맛이 그 사이 많이 서구화되었나? 그런데...
마치 요술 퐁듀를 먹는 듯, 냄비의 치즈가 아무리 먹어도 줄지가 않는다. 아이들은 메뉴를 따로 시켜줘서 그런지 빵조각 몇 개 먹더니 배부르다 한다.
1인분만 시킬걸... 후회해도 늦었다.
에비앙에서의 마지막을 화장실에서 장렬히 마무리한 우리 가족, 오늘 먹은 퐁듀로 인해 아마도 앞으로 또 십 수년간은 이 음식을 다시 먹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는 또?
여행은 낭만적이고 달콤한 순간과, 독특하고 의외의 재미를 주는 순간, 혹은 당혹스러운 순간, 그리고 때론 맘에 도무지 들지 않는 순간 등 여러가지 맛과 재료와 취향을 섞은 초콜릿 상자 같은 것이다.
그 때 그 때 꺼내먹은 ‘순간’들에 너무 좌절하진 말자. 어떤 상자가 내 인생 가장 ‘맛있는’ 여행이 될지는, 지금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