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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와이 Sep 11. 2021

D+20 라우터브루넨에서 견생샷을 건지다

Why? 시리즈가 나오기 이전까지 학습 만화계에서 적수가 없었던 전설적인 베스트셀러 만화이며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는 학습만화의 레전드. 그리고 역덕후 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유럽 6개국을 다루던 1993년 개정판까지를 기준으로, 내용이 당시 어떤 어린이 역사 서적보다 충실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 학번 문과 대학생 중 상당수가 어린 시절 이 책을 읽고 낚여서(...) 역사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이 시기 어린이의 대다수가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해 세계사를 공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위키, 검색어 ‘먼나라 이웃나라’)


나 역시 소위 ‘낚인’ 어린이 중 한 명이었다. 비록 역사학 전공까지 가진 않았지만, 중학생 땐 ‘역사탐구반’에서 활동했고, 고등학교 사회탐구 영역의 선택과목으로는 ‘세계사’를 택했던, 나름 진지하게 진심이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대학생 시절 큰맘 먹고 배낭여행을 하기 전엔 유럽에 한 번도 발을 디뎌본 적도 없을뿐더러, 요즘과 같이 간접체험을 할 기회도 많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유럽에 대한 나의 경험은 오로지 이원복 교수가 전해주는 이 만화를 통해서였다 해도 과장은 아니다. 유튜브도, 아니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 프랑스의 꼬꼬뱅에 대해 읽으며 그 맛이 얼마나 궁금했었는지... 또 밥 한 끼 먹는데 2시간 넘게 걸린다는 코스요리에 대해선 당시 음식에 대해서 가진 내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도 역부족이었다. 제일 쳐주는 요리 방식은 ‘오븐에서 익힌’ 거라는데, ‘빵’ 외에 오븐에서 나온 ‘요리’란 대체 무엇일까?! 밥솥 외에 음식에 관련된 전자제품은 전자레인지뿐이었던, 믹서기 대신 강판에 토마토를 갈아먹던 그 시절 그때의 이야기이다.


스위스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4가지이다!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위스 로망(로망슈어)


...라는 것은 이 만화의 전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사실 가운데 하나이다. 아니, 스위스의 어린이들은 단지 스위스 인으로 태어났기에 ‘4개 국어+(노력에 따라선) 영어’의 5개 국어를 하게 되는 것인가!!


중학생이 되어서야 겨우 알파벳과 영문 필기체를 4선에 써가며 영어를 배웠던 그 시절, 평범한 국민학생으로서 ‘심지어 유럽 언어’에 대한 이해 수준은 아주 미약했을 수밖에 없었다. 미디어에서의 서구에 대한 이미지는 오로지 ‘미국’으로 대표되었던 때 이기도 했다. 만약 지리상, 역사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스위스에 4개의 언어가 정착했는지 연계해서 이해했다면, ‘스위스의 어린이라도 다 하는 건 아냐, 걔네도 힘들긴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텐데.


스위스 헌법상 국어는 4개지만, 엄밀히 말하면 연방 공용어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총 3개다. 로망슈어 화자 수가 불과 5만 명 정도라 공식 업무를 로망슈어로 처리하기엔 효익이 적어 로망슈어 지역에 한해서만 연방 업무를 로망슈어로 볼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고 한다. (스위스 헌법 제4조 및 70조 참고) 스위스는 26개의 주(칸톤, 독일어: Kanton 칸톤, 프랑스어 : Canton 캉통, 이탈리아어 : Cantone 칸토네, 이하 칸톤으로 표시)로 구성된 연방 국가로서 각 칸톤에서 어떤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할지 정할 수 있게 되어있다. 칸톤의 결정의 따라 각 주의 교육과정에서 어떤 언어가 우선이 될지 정해진다.

스위스의 자동차 번호판엔 칸톤을 표시하는 알파벳 2개와 숫자, 그리고 스위스 국기와 각 칸톤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 오늘 우리의 이동경로는 제네바(GE)에서 인터라켄이 속한 베른(BE)이니, 공식적으로 프랑스어권에서 독일어권으로의 이동이다.


안녕하세요? 얀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체크인을 하기 위해 부띠끄 호텔 주인인 얀(Jan)이 운영하는 카페를 찾았다. 독일식 이름과 또박또박한 독일식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만나니, 언어권의 변화가 귀로 느껴진다. 서유럽에 닥친 5년 만의 한파와 폭우는 이 지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인터라켄을 가로지르는 아레강(Aare)의 수위는 위험해 보였다. 계속해서 유량을 살피는 관련 공무원들이 보인다. 하필 우리의 숙소는 아레강의 섬 지형에 위치해 있다...

불어난 아레 강의 유량. 최고 수위까지 한 뼘 정도 남은 모습.


주차를 지상에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하가 침수된 건물들이 많이 있어요.


얀의 조언으로 근처의 Coop에 있는 지하주차장을 이용하려 했던 계획을 변경해, 추가 비용을 내고 숙소 앞의 노상주차를 이용하기로 한다. 우리 숙소의 지하실에도 물이 찼는지 펌프가 쉴 새 없이 물을 퍼내는 중이다...


호텔 주인인 얀이 인더스트리얼 디자인(거친 기계의 느낌을 담은 인테리어) 심취했었는지, 방엔 거대하고 까만 철제 캐비닛과 파이프를 이용한 옷걸이, 철제 이층 침대가 있었다. 어, 그런데, 이런, 탁자가 없다!! 내일부턴 여행 중 재택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꼭 필요한 물품이었다. 에어비앤비 사진상으로는 부엌이 있는 걸로 보였는데? 확인해보니 부엌이 있긴 했다. 하지만 공용 부엌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곳에서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마침 얀이 카페 주인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부리나케 카페로 가 사정 설명을 하니, 흔쾌히 카페 탁자와 의자를 빌려올 수 있었다. 비록, 안락함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튿날 시간을 쪼개 근처의 라우터브루넨(Lauterbrunen)에 방문했다. 이곳은 수직으로 뻗은 절벽에 둘러싸인 산악마을이다. 절벽에선 크고 작은 빙하 폭포가 물을 쏟아 내리고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낙차를 가지고 있다는 슈타웁바흐 폭포(Staubbach falle)이다. 폭포와 절벽 사이로 융프라우요흐가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보였다 가려진다.

라우터브루넨의 정경, 그리고 곳곳에서 만나는 색색가지 꽃들이 반갑다.

어른들은 돌과 물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풍경에 감탄하고, 아이들은 그곳의 작은 놀이터에 신이 났다. 쉴 새 없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있는데, 우리 코코가 앞에 폴짝 뛰어오르더니 슈타웁바흐 폭포와 융프라우요흐가 무안해질 정도로 무심히(!) 영역표시를 했다. 산과 폭포가 소리를 지른다. 우릴 이렇게 무시한 사람... 아니 개는 네가 처음이얏!


이 사진은 코코의 견생샷이 될 것이다.


개를 데리고 여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비교적 개에 관대한 나라들을 여행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챙겨야 할 것도 많다. 숙소는 항상 반려동물을 허용하는 곳을 찾아야 하고, 때론 추가 비용을 내야 하기도 하며, 추운 날씨에도 테라스에 앉아야 한다거나, 아예 입장이 안 되는 레스토랑이 있을 수도 있다. 코코는 양순한 개고, 항상 외출하고선 발과 이빨을 닦고, 백신도 모두 접종했고, 야외에서만 배변을 한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지만, 모두에게 내 수준의 이해를 바란다는 것 역시 무리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항상 조심하는 수밖엔 없는 것이다.


혹자는 ‘개가 경치를  알아’ ‘개팔자가 상팔자다’ ‘라며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생샷 사진을 볼 때마다, 우리 막내와 함께   여정 함께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15-20년 남짓한 기간 찐하게 같이 놀러 다니자, 나도 늙고 너도 늙어가겠지. 우리 가족 코코.


근처 식당에서 뜨끈하고 고기가 듬뿍 들어간 굴라쉬  그릇으로 몸을 녹이고 돌아가기로 한다. 한파와 폭우, 우리가 어찌 조종할 수 없는 재해 속에 계속되는 여행이지만 수프를 먹으며 시냇물(이라 하기엔 불어난 물로 매우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는) 소리를 듣는 우리 마음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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