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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와이 Sep 22. 2021

D+21 인터라켄의 한국 사람들

엄마, 스위스는 맥도널드도 형편없어.


라고 아이들이 투덜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CHF 7.8(약 €7 정도)의 ‘해피밀’에 아이들로선 핵심일 수도 있는 ‘선물’이 들어있지 않았다! 스페인의 해피밀 가격은 €3.95인데, 메인 메뉴에 감자튀김 등의 사이드 한 가지와 사과 슬라이스 같은 과일류 한 가지를 선택하고 거기에 선물까지 따라 나오는 걸 생각하면, 스위스의 상대적 물가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토이가 없다...(실망한 아이의 얼굴이 살짝 비친다)


1974년 텍사스 대학에서 맥도널드 창업자 레이 크록의 강연이 열렸다. 강연이 끝난 후 레이는 학생들에게 '내가 무슨 사업을 하느냐'라고 물어봤다. 학생들은 그저 농담으로 생각하고 웃으면서 햄버거 사업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레이는 "틀렸소. 난 햄버거 장사가 아니라 부동산 사업을 한다오."라고 말했다. 그는 체인점의 부지와 위치가 사업의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고 있었다.


여행자들에게 있어서 맥도널드는 음식점 그 이상의 장소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바로 위의 일화에서 말한 ‘부동산 입지’. 어쩜 그렇게 사람들이 소위 ‘다닐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곳에 맥도널드가 있을까? 마치 오아시스 같이, 저렴한 금액에 간단한 스낵을 제공받을 수 있고, 화장실을 해결할 수 있으며, 심지어 ‘무료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는, 여행자의 체력을 보충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이동 중 ‘여기서 몇몇 km가면 맥도널드가 있어요~’라는 간판이 보인다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제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표시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라켄에선 맥도널드에 ‘단 한번’만 방문했다. 빅맥세트가 CHF 13.4나 하고, 케첩, 마요네즈 등의 소스도 개당 400원-500원으로 사야 한다는데, 불만족스러운 한 끼 식사로 프랜차이즈 햄버거집에서 €50 이상을 지출하는 것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것을 마트를 한번 돌아보고서 깨달았다. 마드리드에선 한국 식품점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포장김치와 컵라면 이라니! (그러나 가격은.. 2배) 그간 인터라켄에 얼마나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찾아왔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신이 나서 열무김치와 라면을 사 왔건만, 전원코드가 스위스 규격에 맞지 않아(스위스도 220V이지만 머리가 통통한 코드? 가 안 맞는다...) 아쉽게도 밥솥은 가동할 수 없었다. 대신 남아있던 메밀면을 삶아 열무김치를 넣은 정통(!) 비빔국수를 만들어서 맛나게 한 그릇 비우니 든든하다. 공용 식당이기에 혹시나 냄새가 날까 싶어 뒷정리에 더욱 신경 썼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열무김치가 가득 든 국수는, 집에서도 못 만들어 봤다.


식당에는 패러글라이딩, 산악자전거 등의 액티비티를 소개하는 팸플릿들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3개 국어-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한국어로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남달랐다. 2018년 기준 스위스 트래블 패스의 매출액 1위, 성장률 1위(전년 대비 42%, 스위스관광청 참조) 기록했다고 하니, 스위스와 인터라켄은 정말 많은 한국인들에게 사랑받았던 여행지인 것이다. 스위스는 올해 6월 경부터 한국을 포함한 몇몇 나라들에 대해 관광의 문을 열고 있지만 7월 중순인 지금 이곳의 관광업이 활기를 되찾기는 한참 멀어 보였다. 9월 중순 현재에도 아직 한국의 상황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위기에 강한 한국인이니 만큼 부정적 상황에서 곧 벗어나,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예전처럼 많아지길 기대해본다.



음, 오늘 올라가실 거예요?
저기 화면을 보시고 결정하셔도 됩니다.


First(피르스트)로 올라가는 곤돌라 매표소의 직원이 걱정스레 묻는다. 정상의 기상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화면엔 하얀 구름이 가득 차 있다. 망설이며 남편을 돌아보자 단호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오늘 아니면 가보지 못할 수도 있어.


마법의 단어 ‘지금 아니면’에 결국 표를 구매했다. 어른은 각 CHF64, 아이들은 CHF20.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지금 아니면’이지 않은가.


피르스트는 해발 2168m에 위치한 전망대이다. 해발 1034m의 그린델발트(Grindelwald)에서 출발하는 곤돌라를 타면, 도중에 보어트(Bort, 1570m)와 슈렉펠트(Schreckfeld, 1955m) 를 거쳐 올라간다. 원래는 전망대와 주변 역 근처를 하이킹하며 멋진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오는 도중에서부터 흩날리던 빗방울이 심상치 않다.

곤돌라를 타고 올라갈 때 보이는 그린델발트 전경. 점점 날씨가 흐려진다.
... 여러분이 알고 있는 가장 높은 절벽의 꼭대기에 서서 그 절벽 밑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 절벽의 바닥이 실제보다 훨씬 아래로 열 배, 스무 배 더 뻗어 간다고 상상해 보라. 그렇게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얼핏 양 떼로 착각했던 작고 하얀 것이 사실은 구름, 그것도 자그마한 안개의 소용돌이가 아니라 웬만한 산만큼이나 거대하고 하얗고 몽실몽실한 구름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리고 마침내 그 구름 사이로, 너무나 아득히 멀어서 들판인지 숲인지, 물인지 땅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진짜 밑바닥을 비로소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고 상상해보라....
(C.S.루이스, 나니아 연대기 6권 ‘은의자’ 중)


정상에 올라 피르스트 클리프 워크(First Cliff Walk)를 걷는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머리 끝에서 쭈뼛 선다. 하얀 구름에 가려 안 보이지만 상상 속의 높이에 서 있기에 더욱 아슬아슬하다. 철근으로 만들어진 길 끝엔 통유리로 절벽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용기를 내어 질끔 감았던 눈을 뜨고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천 미터의 허공으로 구름들이 재빠르게 지나가는 걸 보자 놀이기구를 탈 때처럼 몸속 어딘가가 붕 뜬 듯한 느낌에 난간을 힘주어 잡았다. 용기를 내어 다시 아래를 쳐다봤다.


영화 ‘와호장룡’의 마지막은 여주인공 용(장쯔이 분)이 이런 깊은 구름 속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최고의 능력과 젊음, 아름다움, 고귀한 태생, 모든 것을 갖춘듯해 보였던 여주인공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타인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에 대한 속죄로 죽음(영화에선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을 택한다. 아름답게 그려졌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여주인공 수련(양자경 분)이 피눈물을 흘리며 허락해준 자신의 두 번째 삶을 허무하게 내던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한 때는 나 역시 젊고 치기 어린 삶을 살았다. 내가  세상의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았고, 내 능력이 출중하여 가만히 있어도 세상의 조명이 날 비출 것 같이 느껴졌던 순간들. 어느덧 앞자리가 4로 시작하는 나이를 바라보며, 내려놓고 내려놓고 또 내려놓으며,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이 얼마나 명언인지를 매 순간 깨닫고 있다. 젊음과 활력의 빈자리를 겸손과 성숙이 채워준다면 고마울 뿐이다.


매 순간 내 능력 밖의 일들은 차고 넘친다. 지금만 해도 이 지역 최고의 절경이라는 피르스트의 전경을 보는데 ‘역시’ 실패하고 만 것이다. 구름 구경만 실컷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니면’이라는 마법은 아직은 효과가 미미하게 남아있었지만, 구름이 휘감은 전망대에서 최고로 비싼 코코아를 마시며(올라온 값까지 치면) 생각했다. 아쉽다......

얼마 짜리 코코아냐......

달콤하고도 쓴 코코아를 마시고, 폭망 한 피르스트 구경을 등지고 곤돌라를 타고 다시 하강했다. 헛헛한 마음을 채우라는 듯, 근사한 전망의 ‘산 위 놀이터’(Bort 보어트 정류장), 가 마음을 달래준다.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의 놀이터 중 한군데일 거라고 ‘가족 피셜’ 시상해준다. 맘대로 안 되는 상황을 내려놓고 다른 의미를 찾아보려 노력하는 것은,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레 터득된 ‘생활의 지혜’다.

깔끔한 내려놓음도, 썩 나쁘진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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