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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와이 Sep 28. 2021

D+22 유럽의 꼭대기에 서서


Top of Europe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의 별칭이다. 팩트를 체크해보자면, 사실 융프라우는 유럽의 최고봉이 '아니다'. 러시아 중앙에 있는 옐브루스(5642m) 산이 유럽지역의 최고봉이며, 같은 알프스이지만 프랑스 지역에 속한 몽블랑(4808m)조차 융프라우보다 더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팅적 측면에선 분명 'Top'이요, 인지도 측면에서도 'Top'인 지역임은 분명하다. 특별히 한국인들에게 있어선 한국 내 융프라우 마케팅을 주도하다시피 하는 동신항운(주)라는 회사의 파격적인 프로모션으로 인해, 스위스 내 그 어느 지역보다도 잘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곳이다. (일례로 '융프라우 올라가서 신라면을 먹어야 해!'라는 한국인 특유의 루틴을 개발한 회사가 동신항운이다.)


융프라우요흐가 이렇게 마케팅에 주력한 이유는 스위스 내 칸톤의 경쟁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터라켄과 그린델발트 지역, 즉 융프라우로 관광하는 시작점이 되는 지역은 스위스의 칸톤(스위스의 주 개념)상 '베른'에 속해 있는데, 이 지역과 관광객 유치에 있어 경쟁 관계에 있는 지역이 있으니, 바로 스위스의 '발레' 칸톤에 속한 체르마트의 고르너그라트(Gornergrat, 3089m)이다. 하지만 1912년 개통된 융프라우 철도가 융프라우요흐(해발 3454m)까지의 여행길을 연 이래로, 융프라우요흐는 항상 알프스 관광의 Top으로서 자리매김해 왔다. 그리고, 팬더믹 상황 중(급속히 줄어든 관광객 덕분(?)에 공사에 속도를 낼 수 있었던 듯) 융프라우요흐에의 도착시간을 무려 47분(편도 기준)이나 단축한 초대형 곤돌라 ‘아이거 익스프레스(Eiger Express)’ 운행이 6월 중 시작되어, 기존의 체르마트 관광보다 20분 정도 '더' 걸리던 등반시간을 되려 30분 정도를 '더' 단축하였다. 탐험과 모험의 낭만보단, 기술과 투자로 이루어낸 시간 단축의 성과가 더욱 돋보이는 시대인가 싶다.


어찌 되었든, 오늘 우리 가족은 6  오픈한  문명의 이기를 몸소 체험하며 이곳에 도착했다. 아이거 익스프레스로 꼭대기까지  번에 올라오는 것은 아니다. 그린발트의 터미널에서 중간 역인 아이거 글렛쳐(Eiger Gletscher, 2320m)까지만 운행되고, 거기부터는 다시 기존의 융프라우반(Jungfraubahn) 타야 한다. 기존의 융프라우 철도와 아이거 익스프레스는 가격 측면에서는 거의 비슷(아이거 익스프레스-왕복 기준 성수기 성인 CHF 230, 아동 CHF 20)하고, 왕복 시간으로는  1시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시간 상으론 아이거 익스프레스가 우세하지만 철도를 이용할 경우 산등성이의 풍경을 가까이 즐길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결코 적지 않은 관광비용을 어떤 방식으로 소비할지는 여행자의 선택에 달렸다.


본디 같았음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 없었을 이곳은 코로나의 영향으로 어디라고 할 것 없이 한산하다. 26인승으로 설계된 곤돌라에 고작 네 명에 작은 개 한 마리만 올라탔다.


마치 작은 우주선에 올라탄듯한 느낌이다. 이내 우리를 실은 작은 공간이 조용히 지상에서 살짜기 발을 떼고 둥실 떠오른다. 순식간에 본디 크기 만했던 출발지 그린발트의 집과 건물들이  만해졌다 수첩 만해졌다 성냥갑 만해지고 작은 레고 블록 만해졌다. 그럴수록 점점 험하기로 악명 높다는 아이거 산이 실시간으로 가까워진다. 이렇게 편안하고 안락하게  자존심 강한 산에 다가갈  있다는 것은   바쁜 여행자들을 위해 자본주의가 만들어준 행운이다.


상승하면서 보이는 그린델발트 전경
아이거 Eiger
그린델발트의 초록 융단

아이거 익스프레스가 자랑하는 것이 바로 360도 파노라마 뷰. 곤돌라를 감싼 통유리에는 전부 열선이 내장되어 있어 기상 상황에 관계없이, 뷰를 즐길 수 있다고 홍보한다. 물론, 성에가 끼지 않는다는 이야기지 바깥 날씨는 자기 기분대로 움직인다. 살짜기 구름이 끼긴 했지만, 오늘은 그에 대항하는 해님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그간 날씨로 마음고생한 것에 비하면 오늘의 이 정도 날씨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곤돌라를 타고 순식간에 구름 속으로 진입했다 나왔다. 초원 위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만년설 조각들 사이로 조용히 그림자를 비추며 지나간다. 조금 손만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얼음 조각들은 멀리서 볼 때 하얀 덩어리로 보였던 것과 달리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유물이다.


작은 우주선을 타고 다른 세계의 어떤 공간으로 온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찰나, 어디선가 들리는 소 방울 소리와 빼곡한 나무 사이로 보이는 트래킹 코스가 이미 오랫동안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우린 외따로 독립된 공간에서 조용히 이곳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이다.

기존의 융프라우 요흐 철도.

어느덧 중간역인 아이거글렛쳐에 도착했다. 이제 융프라우반을 타고 유럽의 꼭대기로 올라갈 차례이다. 수년 전 이곳에서, 융프라우반이 빙벽을 타고 올라가는 스펙터클을 보여줄 걸로 기대하고는 적잖이 실망했던 적이 있다. 세 개의 봉우리를 뚫고 올라가는 이 철도는 야외의 모습은 전혀 볼 수 없는 지하철  같은 것이다. 남편 역시 똑같은 기대와 실망을 한 듯......


특이하게 융프라우반 안에서 코코에 대해 추가적으로 CHF30을 지불했다. 아이들의 총 왕복 비용이 CHF20이었다는 것에 비하니 더욱 비싼 강아지 표 값이다. 코코가 귀여운지 승무원 아저씨가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시길래 흔쾌히 허락했다.


자릿값도 냈으니, 한 자리 차지해도 된다. 코코야.


눈보라가 몰아쳐 시계가 새하얘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파랗고 깨끗한 하늘이 비쳤다.  


하아, 내쉬는 숨이 찬 공기에 맺힌다.


이 지역의 '인싸' 이자 최고봉인 융프라우(Jungfrau, 4158m)

각진 산등성이가 돋보이고 이름답게(수도사라는 의미) 과묵해 보이는 묑크(Mönch, 4107m)

알프스의 벽 중 가장 악명 높기로 유명한 아이거(Eiger, 3970m)

그리고,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유럽에서 가장 긴 빙하 지형이라는 알레치 빙하(Aletschgletscher)


2천만 년 전, 알프스 꼭대기에도 훈풍이 불던 그 시절엔 풍부한 유량을 자랑했을 물길이 그 모습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 곳이다. 7월의 한 중간에 있음에도, 유럽의 이상 한파 때문인지 여름이 전혀 찾아오지 못한 모습이다. 시시각각 눈바람이 덮쳤다 지나가는 날씨가 계속된다.


이렇게 기술이 발달한 요즘에도 종종 험한 산에서 조난되는 산악인들의 뉴스가 들리곤 한다. 그들을 불시에 덮쳐 불상사가 일어나게 하는 블리자드(풍속 14 m/s 이상, 저온, 시정 500 ft(피트) 이하인 상태)가 이런 것일까? 불과 백몇 년 전 누군가에겐 영원한 탐험의 대상이었을 이곳, 지금도 이 빙벽 어딘가에서 도전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곳에, 순간 이렇게 손쉽게 올라와서 즐기는 것이 어쩐지 조금 쑥스러워졌다. 마치, 3분이면 덥혀 먹는 레토르트로 만들어진 세계 정상급 셰프의 요리 같은 느낌이다.


만약 또다시 이곳을 방문하는 날이 온다면, 직접 밟고 걷고 느끼고 싶다. 빠르고 편하게 가 아닌, 조금 느리고 고생스럽더라도 말이다. 나에게 이런 마음, 이 열정이 오래 남기를. 그리고 내 체력이 허락하는 한 그날이 멀지 않은 때 오기를, 이곳에서 보이는 하얀 설원에 작은 소원을 남겼다.



이곳 스핑크스 전망대 안엔 카페테리아와 린트 초콜릿 가게, 그 밖의 여러 가지 볼거리들이 갖춰져 있다. 아이들은 대형 스노볼의 움직이는 인형들에 마음을 빼앗겼다. 나 역시 이곳저곳을 살펴보다, 벽에 그려진 그림 한 장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가뿐한 복장을 하고 ‘최초’의 정복감과 환희를 느끼는 주인을 바라보는, 큰 짐을 매고 뒤따른 하인의 턱선이 조금 씁쓸해 보이는 것은 비단 내 상상 속의 일은 아니었으리라.


전근대 사회에서의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과 탐험은 귀족 혹은 부르주아의 전유물이었을 것이다. 일단, 이를 위해 투입할 수 있는 (몇 달간 생업을 떠날 수 있는) 시간이 필수적이요, 위험한 지역에 대한 노하우를 습득하거나 살 수 있는(셰르파를 고용하는 등의) 경제적 여유 또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험난한 곳에 올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누구나에게나 열어준 것은 바로,



쉽게 올라왔다고 레토르트를 먹는 것 같다는 둥, 칭얼거렸지만, 이곳에 올라오는 ‘길’이 없었다면 하물며 이 험준한 융프라우요흐에 오는 계획조차 세울 수 있었을 리, 생각조차 했을지가 만무하다. 길이 있었기에 가능한 모든 것이다. 백몇 년 전 이곳에 올라오는 철도길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투입되었고, 일부는 목숨을 잃었다. 경제적인 보상을 바라고 참여했으니 응당 그 리스크도 져야 하는 거라 비아냥 거린다면, 생각해보라. 세상엔 훨씬 많은 보상을 아무런 위험 없이 가져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때, 지금의 나보다 곱절은 젊었을 사람들의 이름을 보며 한층 숙연해진다. 이들로 인해, 누구나 이 아름다운 산을 짧게나마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어느덧, 우리의 여행은 꽉 채운 3주를 넘겨 여정의 중반을 넘기고 있다. 여정을 반 시계 방향으로 그린 큰 원에서 중간지점 정도에 도달했다


앞으로 몇몇의 계획은 수정되거나 취소하게 될 것이고, 몇몇의 반가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부족한 준비와 돌발상황, 맘대로 따라주지 않는 날씨 등 여러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다행히 온 가족 모두 건강하다는 것이 커다란 위안으로 다가온다.



인생은 자전거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기 위해선 움직여야 한다.
-아인슈타인-

융프라우에서의 한나절을 뒤로하고 다시 움직인다.

우리 인생에서 다시없을 이 시간들, 이 시간들의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시 달린다.



여담으로, 스위스 사람들이 한글로 쓰인 ‘스위스’의 국가명을 보면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스 위 스


산(스) 속에서 한 손에 작대기를 들고 있는(위) 사람의 모습 그대로인 글자라고. 산과의 끊임없는 투쟁과 공존을 꾀했던 스위스인의 바로 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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