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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안 Sep 17. 2019

시간과 시선, 위로까지

<벌새>

[스포 주의]



 1994년이라는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은희의 일상을 쫓는 이 영화는 한 명의 삶에 투과하여 비추어지는 시대의 단상을 읊는다. 울음이 터져 나오려다 보이지 않는 손에 입이 틀어 막혀버린 사람들, 녹슨 철문에 그려진 붉은 글자들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 폭력에 물들고 이야기 속에서 소외되어 있던 아이들과 그들의 상흔들, 무너진 다리 아래에서 울음을 삼키며 남겨진 사람들과 떠나간 사람들. 시대 안에 분명 존재하지만 주목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이 영화는 카메라를 움직인다. 카메라는 한 시대를 바라보지만 시간에서 멈추지 않고 시간 안에서 작게 숨 쉬고 있던 사람들을 들여다본다. 한 시대에 흔적은 뚜렷한 인간상 뒤로 뿌옇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숨어있고, 이 영화는 시대 안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던 은희를 보기 위해 움직인다. 그렇게 영화가 은희라는 존재와 마주했을 때, 우리는 시대가 은희를 관통하며, 은희가 시대를 관통하며 발생하는 사건들을 마주하게 된다.  

   


 <벌새>는 전진과 극복의 도식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벌새>의 결말에 이르면 처음처럼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 놓인 은희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마치 크게 곡선을 그려나가다가 끝내 원처럼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벌새>는 전진이 아닌 귀로의 서사를 지니고 있다. 한문 선생님을 만나 힘을 얻지만 이별하게 되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지만 곧 상처 받게 된다. 상처를 치료하지만 다시 폭력에 상처가 덧대어진다. 큰 곡선을 그려가는 <벌새>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되지만 곧 그 희망이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다. 원점으로 돌아와 허탈함이 들기도 하지만 되돌아온 상황 가운데에 서있는 은희의 눈은 이전과 달리 반짝거림이 담겨있다.



 <벌새>가 원을 그리며 흘러가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는 회귀의 이야기라면 우리는 어째서 <벌새>를 보면서 따듯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일까. 성공이 아닌 실패를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마음 한편이 혼혼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또한 다시 출발선에 도착한 은희를 보며 우리는 왜 은희가 앞으로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영화의 마지막에 고개를 돌리며 발산하는 은희의 단단한 시선 때문일 것이다.

 <벌새>에서는 수많은 시선들이 오고 간다. 은희를 중심으로 마주하기도 하고, 빗겨나가기도 하는 수많은 시선들. 은희가 친구에게 배신당한 후 한문 선생님이 은희를 바라보는 시선, 은희가 친오빠에게 맞았다며 가족들에게 말한 뒤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언니가 은희를 바라보는 시선, 은희를 좋다며 따라다니는 후배의 시선과 같은 수많은 시선들이 은희와 닿았을 때 그곳에서 우리는 시선이 주는 어떤 강렬한 따듯하면서도 설레는 감각에 휩싸이게 된다. 영화의 시선이라 말할 수 있는 카메라 또한 은희의 감정의 표면을 지긋이 바라본다. 은희가 거실에서 뛰어다니는 장면에서는 한 발짝 뒤에서 감정이 폭발하는 과정을 바라봐준다. 마치 그래도 괜찮다는 듯이 말이다. 다양한 시선들이 지나가는 <벌새>는 그런 의미에서 시선의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은희 주변으로 교류되고 교차되는 수많은 시선들이 이 영화의 주된 활력이 되지만, 시선이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시간 앞에서 사람 관계의 시선들은 아주 무색하고 차가울 정도로 돌변한다. 영화는 이 안타까운 현실을 부정하며 이상론이나 꿈으로 향하지 않고 영화 속에 있는 그대로의 변화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렇게 곡선을 그려나가던 이야기가 이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듯이 방향을 바꿔 원점을 향해 은희를 붙잡는다. 시선은 단절되고 설렘은 배신이 되며 상처는 덧나게 된다. 시간이 시선을 왜곡시키고 그것이 큰 곡선을 그리며 칼날 모양을 하고 은희에게 다가온다. 좋아했던 후배가 자신에게 ‘그건 저번 학기잖아요’라고 말하는 것이 시간을 체감함과 동시에 시간이 왜곡시킨 시선의 온도를 그대로 나타낸다. 이번 학기와 다음 학기와의 시간이, <벌새>는 그 겹겹이 쌓인 시간들의 집합. 즉, 시대의 비극을 성수대로라는 상징물로 확장된다. 무너지게 된 다리의 모습을 보며 성수대로라는 한 시대의 비극. <벌새>는 시간의 비극을 시대의 비극으로 바꾸고 시대의 비극을 성수대로라는 대상으로 확장시키길 바란다. 하지만 성수대로라는 비극적 사건을 은희라는 한 존재의 시선에 머무르며 단순한 영화의 상징물로 바꾼 것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감독이 무너져가는 성수대로의 모습을 보며 은희와 같이 시간을 마주하고 그것이 관통한 자신의 삶의 비극을 납득하기 위해 노력했으리라 생각한다.



 <벌새>는 큰 곡선을 그리며 원을 만들어 다시 되돌아오게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시작점에 다시 도착한 은희의 표정은 영화의 시작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은희와 분명 다르다. 되돌아왔지만 그 사이 은희는 달라졌다. 자신을 들이지 않는 무심한 문 앞에서 외치던 울음이 사람들 틈 속에서 끊임없이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발산하는 눈으로 달라졌다. 시선의 객체가 시선의 주체가 되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눈으로 목격되길 바라던 은희에서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은희로 말이다.


 시선의 대상에서 시선의 주인이 된 은희가 목격한 것은 시간이다. 정확히는 시간에 의해 변화하는 것들이며 그것은 비극적인 사건들과 그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한문 선생님의 ‘나는 내가 싫어질 때, 그 마음을 그냥 보려고 해’라는 말처럼 은희는 자신의 상처를, 자신의 아픔을 빤히 쳐다본다. 카메라도 그에 동조하듯이 귀 수술한 부위(머리카락에 가려 안 보이지만)가 보이는 방향에서 은희를 바라본다. 상처를 바라보는 카메라처럼 은희 역시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려 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영화에서 아름답게 표현된다. 비극적인 사건에 의해 난 상처를 바라보는 시선의 아름다움이 <벌새>의 아름다움이자 가장 따듯한 위로가 된다. 은희는 다시 날갯짓 시작한다. 마치 벌새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날개를 휘저으며 추락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만들어내는 영화. <벌새>는 시간에 의해 변화하는 비극이란 시대에서도 추락하지 않으려 날갯짓하는 은희라는 벌새를 위한 영화이며, 그 시대의 모든 은희들을 위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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