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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안 May 21. 2024

자살에 관한 짧은 글

사이먼 크리츨리 <자살에 대하여>

 사이먼 크리츨리의 <자살에 대하여>라는 책을 좋아합니다. 처음에는 제목에 이끌려 가볍게 든 책이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자살에 관한 저자의 논리에 설득되었고 이윽고 도달한 결론이 나름 만족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책에서 주장한 논리 전개를 일일이 설명하면 너무 복잡하기에 자살에 관한 제 생각만 짧게 말하고자 합니다.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 중 실존에 대해 고민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상담할 때 저에게 ‘살아야 할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구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우울증과 자살 사이에는 높은 연관성이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걱정되는 점은 우울이 실존적 허무를 불러왔든, 실존적 허무가 우울을 불러왔든 상관없이 그에 관한 사회의 대답이 별로 와닿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하미나 작가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에서는 우울증과 자살 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의문을 던집니다. 저자는 한 개인의 자살을 둘러쌓고 있는 여러 요인이 결코 ‘우울’만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개인에게 가해지는 환경적 요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불합리함이나 사회의 구조적 문제 등이 더 근본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고도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울하다고 하여 꼭 자살이라는 결론에 귀결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울하기에 자살을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즉, 자살을 결정하는 데에는 우울만이 아닌 무수히 많은 요인이 작용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울과 자살은 명확하고 정확한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자살은 우울 하나만으로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복합적이므로 자살에 관한 대답 역시 복합적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사회는 자살에 관하여 ‘생명 존중’이라는 단일한 근거만을 슬로건으로 내세웁니다. 그래서 조금 아쉽습니다. 자살은 그리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 중에서는 ‘살아야 할 이유’를 묻는 자들이 많습니다. 자녀를 위해 살았던 부모는 자녀가 없어진 자리에서 살아야 할 의미를 물었고, 성공을 위해 살았던 이는 실패한 자리에서 살아야 할 의미를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살을 막기 위해서는 살아야 할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이때 사용되는 의미에 관한 치료가 바로 ‘의미치료’에 해당할 겁니다. 빅터 프랭크가 홀로코스트 수용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바로 이 ‘살아야 할 이유’, ‘의미’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바로 살아야 할 이유를 탐색하고 찾는 과정에 관한 내용입니다.


 살아야 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살을 중단하고 삶의 동력을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이러한 맥락으로 자살에 접근하는 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자살에 관한 개입 역시 개별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자살에 대하여>는 위에 살아야 할 이유를 탐색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저자인 사이먼 클리츨리는 자살을 막아야 할 논거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살해야 할 논거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즉, 자살을 막을 이유도 자살할 이유도 모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살에 대하여>의 결론은 실존에 대한 깊은 사유를 정지하길 말합니다.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탐색하는 걸 중단하라고 합니다. 저자는 그 대신 손등에 올라온 햇빛의 온기에 관하여 말합니다. 살랑 불어온 바람에 관하여 말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읊조리며 자신의 자살을 중단합니다.


너무 아프도록 실존을 고민한다면 그만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오늘 하루 맛있는 카레를 끓이고 미뤄둔 집안일을 했습니다. 원래 오늘 하기로 했던 운동은 내일로 미뤄두었고 그 시간에 이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자아의 실존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오늘 저녁에 만들 카레에 들어갈 양파의 개수를 고민했습니다. 삶의 허무함을 느끼기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밤바람 냄새에 기분이 좋아짐을 느꼈습니다. 지난 일에 신경 쓰기보다 오늘 사용한 텀블러를 깨끗이 설거지했습니다.


내가 오늘 하루를 버티게 한 건 ‘사랑’, ‘운명’, ‘의지’, ‘열정’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보낸 건 오늘 만난 사람과 날씨가 갑자기 더워졌다는 사소한 잡담이었고, 오늘 하루가 기분 좋았던 건 이전에는 실패했던 카레가 오늘은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내일이 오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내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어제를 후회하지 않는 것은 어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냥 사소한 잡담과 만족스러운 카레 요리, 기분 좋은 밤바람 냄새와 처음 간 카페의 맛있던 디카페인 커피가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것들로부터 삶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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