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기 위해 좌석에 앉아있었다. 왼쪽에 한 쌍의 연인들이 앉았는데 그들은 잠시 후 상영될 <1917>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쟁하는 곳 한가운데에 있는 느낌이려나?” 그리고 영화는 그들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영화는 1차 세계대전의 병사 스코필드를 따라다니며 관객에게 주인공의 시간을 체험시킨다. 그렇게 관객은 영화가 진행되는 시간 동안 스코필드의 경험에 동참하게 된다. 그가 경험한 것은 관객도 알고, 그가 경험하지 않는 일은 관객 역시 모른다. 이와 같은 주인공의 시야로 경험이 통제되는 연출 방식은 마치 전쟁의 경험을 전지적인 시점에서 보여주지 않는다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옆 좌석에 있던 연인들의 말처럼 우리는 ‘전장’의 한가운데에 놓여있으면서도, ‘전장’의 경관을 목격할 수는 없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1917>은 폭음이 쏟아지고 혈흔이 낭자한 전쟁을 묘사하는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관객의 시점을 스코필드라는 인물의 시점으로 제한을 두고 전투가 아닌 다른 임무를 부여해 영화에 다른 방향성을 제시한다. 주인공에게 전투를 하라는 임무가 아닌 전투를 중단하라는 임무를 주는 것이다. 그렇게 주인공과 동행하는 영화의 방향성은 ‘전투’가 아닌 ‘전투의 중단’이 된다. 영화는 전투의 중단이 목적이 된 이상 전쟁영화 특유의 전투를 통한 ‘승리’나 ‘패배’의 성취를 활용할 수 없다. 훈장과 같은 명예를 들이밀 수도 없다. 그리고 전투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곧 주인공의 실패가 되기 때문에 전투가 없어야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전투가 없어야 완성되는 전쟁영화라는 독특한 구조. <1917>의 목적은 전투의 실패인 셈이다.
스코필드와 블레이크에게 전투의 중단이라는 방향성이 제시되었다.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안전하고 빠르게 메켄지 중령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동이 영화를 이루는 가장 큰 축이 된 이후 카메라가 선택한 일은 그들의 이동을 시선에 담는 것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이동하는 그들의 이동이 영화 내에서 작동하는 가장 강한 힘이 되고, 카메라는 그 힘을 따라 계속해서 동참하며 힘겨운 여정에 동참한다. 어떻게 찍었는지가 정말 궁금할 정도로 대단한 카메라 기술이 사용된 <1917>은 그 기술을 오롯이 스코필드의 여정을 함께하기 위해서, 그의 시선에 있을 전쟁의 형상을 담을 뿐이다.
스코필드는 철조망에 상처가 나고 시체에 다친 손이 들어가고, 이어서 부비트랩으로 인해 무너지는 동굴에서 가장 크게 다치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의 동료 블레이크가 죽음을 당하며 혼자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스코필드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블레이크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달려간다. 더 이상 그에게 이 임무는 군인으로서의 가치가 아닌 스코필드와 블레이크 간의 약속이라는 가치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가 메켄지 중령을 목전에 두고 갑자기 전장 위로 발걸음을 옮긴 선택은 영화 내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이다. 모든 병사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투를 위해 달려갈 때, 스코필드는 전장을 가로지르며 달려간다. 뒤로는 폭격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쓰러지지만 카메라의 중심에는 스코필드의 맹렬한 의지로 가득하다. 전투를 중단시키기 위한 강한 의지. 카메라가 계속해서 쫓던 의지의 형상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우리에게 전투의 실패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영화가 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감동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