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안 Feb 19. 2020

네가 부르지 않아도 나는 꽃이다.

<톰보이>

<<스포 주의>>


 김춘수 시인의 '꽃'의 화자는 타자의 부름을 소망한다. 그리고 그 부름이 하나의 몸짓에 그칠 뿐인 자신을 아름다운 꽃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 확신한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각자가 서로에게 한 송이의 꽃이라는 '의미'가 되길 바라며 서로의 이름을 갈구한다. 물론 김춘수 시인의 <꽃>은 정말 아름다운 시다. 우리는 타인에게 불리며 수면 위로 떠오른 연꽃처럼 풍만한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우리를 한 송이의 꽃이라 불러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로 숫자로 우리를 부르기도 하며, 편견으로 우리를 부르기도 한다. '남성/여성', '상층민/하층민', '진보/보수' 등 우직한 잣대들이 참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꽃>의 초라한 몸짓에 불과하다는 구절만 더욱 처절하게 체감하게 만든다. 우리의 이름을 말할 목소리는 희미해지고 타자들이 정한 잣대 안에서만 스스로를 증명해나가는 것이 최선이 세상. 셀린 시아마 감독의 <톰보이>는 그런 폭력적인 세상을 향해 날카롭고도 따듯하게 '로르'의 이름을 되새긴다.


우리의 정체성이 타자에 의해 증명되고, 증명해야 한다면 그것은 결국 폭력이 된다.


 <톰보이>의 '로르'는 '미카엘'로 불리고 싶어 한다. 그리고 '미카엘'은 친구들 무리에서 남성으로 불리길 좋아하며, 동생에게 오빠에게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남자아이를 모방하고, 여성 수영복을 남성용처럼 바꿔 입으며, 찰흙으로 남성의 성기를 만들기까지 이른다. 그렇게 '미카엘'은 침 뱉기로, 수영복으로, 찰흙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상황은 어머니가 '로르'가 '미카엘'로 불린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로 크게 바뀌게 된다. '로르'는 파란 원피스를 입혀지고 끌려다니며 친구들로부터 자신의 생물학적 성(sex)을 증명당한다. 여기서 '로르'는 자신을 증명할 기회조차 없다. 만약 있더라도 그 누가 그 아이의 말을 들어줄까. 방법을 안다면 알려달라는 '로르'의 어머니의 대사는 증명할 수 없다면 증명되어야 하는 세상의 잔인한 작동방식을 설명하는 것처럼 들린다. 애초에 증명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었다면 아마 그 누구도 상처 받지 않을 텐데 말이다.



 여기서 두 가지의 관점을 제시하고 싶다. '증명한다.'와 '증명되다.' 전자는 '미카엘'의 경우가 될 것이다. '미카엘'은 앞서 말한 것처럼 침 뱉기, 수영복, 찰흙을 통해 자신을 남성으로 증명해간다. 중요한 것은 왜 증명하고 다니는 가이다. '로르'는 남자아이들과 축구하기를 좋아하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우격다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아이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만 같은 아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 남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남성이어야 다음과 같은 성향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로르'가 다음과 같은 성향을 인간관계에서 무리 없이 펼치기 위해서는 '로르'가 아닌 남성으로 증명된 '미카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르'는 자신의 성향이 반박되지 않기 위해서는 '미카엘'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증명되다.'는 당연히 어머니의 개입과 이후 아이들과 로르의 숲 속의 추격 시퀀스가 될 것이다. 어머니의 개입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으니 생략하고, 숲 속 시퀀스는 어머니의 개입 이후로 이어지는 두 번째 폭력이다. '미카엘'이 사실 허구였음을 들은 아이들은 '로르'의 생물학적 성을 증명하기 위해 둘러쌓는다. 결국 리사로부터 직접적이며 강압적으로, 폭력적으로 자신이 증명되고 만다. 여기서 '로르'를 둘러싼 이들의 목적은 그가 남성/여성 중 어느 성별을 가졌는가에 있다. 이 잣대에서 '로르'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남성과 여성으로 양분화된 젠더리즘은 개인의 실존적인 가치를 철저하게 억압시켜버린다. 이 잣대에서 우리는 남성 혹은 여성으로만 불릴 뿐이다.



 결국 '미카엘'은 부정당하고 '로르'만 남게 되었다. 이제 '로르'는 '미카엘'로서 친구들에게 남성성을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더 이상 젠더리즘에 묶인 채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미카엘'이라는 가명이 무의미해진 지금 '로르'는 더 이상 타자의 부름에 기대어 꽃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로르'는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목소리로 호명한다. 자신의 이름을 자신이 부름으로써 '로르'는 홀로 오롯이 서있는 진정한 '꽃' 된 셈이다


작가의 이전글 지키기 위한 질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