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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안 Jan 17. 2020

지키기 위한 질문

<사마에게>

  

 폭격 소리가 들리고 건물이 흔들린다. 사람들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기 위해 서둘러 움직인다. 하지만 카메라는 누군가를 찾고 있다. “사마는 어디에 있죠?” 흔들리는 천장에서 떨어진 석회가루는 안개처럼 시야를 가리고 카메라는 그 속을 헤치며 두리번거린다. 다급하게 사마의 행방을 묻는 카메라의 시선은 폭격과 함께 흔들리지만 카메라가 향하는 목적지는 명확하다. 곧 카메라는 사마를 찾게 된다. 폭격 소리에도 평온함을 유지하는 사마의 얼굴이 카메라에 닿자 그 모든 소음은 가라앉고 미친 듯이 흔들리던 모든 것들이 잠잠해진다. 안심하는 카메라는 사마의 얼굴을 스크린에 가득 담으며 말한다.


“사마, 이 영화를 네게 바친다.”



 <사마에게>를 보고 있으면 이것이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가슴 아픈 사실로 다가온다. 다친 사람과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의 울부짖음은 관객석에 앉아있는 내게 강렬하게 마음을 뒤흔들었다. 스크린과 내가 가진 거리감은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가까워서 눈물을 참을 수도 그 폭격에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언제나 ‘현실’은 고통스러운 것임을 다시 한번 체감한다. 그리고 이 공포 속에서 함께 휩쓸리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는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체 이 광기를 어떻게 버티는 것일까. 그리고 그 광기를 찍어가는 저 열정은 무엇일까.


 카메라가 흔들리면 우리도 함께 흔들린다. 카메라가 웃으면 우리도 웃는다. 카메라가 울면 우리도 울어버린다. <사마에게>를 보며 내가 느낀 것은 그야말로 영화적이라는 표현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있을까. 처참한 알레포와 그 속의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것의 대부분은 동정심이 아닌 절망감이었다. 그 둘의 차이는 거리감의 차이일까. 명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게 동정심은 불쾌한 감정이다. 내가 저들은 동정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잠시 <가버나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어디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가버나움>은 안 되고 <사마에게>는 되느냐?’ 일단 첫 번째로 누가 가버나움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는지 만나보고 싶다. 왜냐하면 나 역시 비슷하게 생각하기 때문. 물론 가버나움이 최악의 영화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가버나움을 보고 나온 뒤 가장 처음으로 든 감정이 동정심이라 스스로를 자책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이는 영화의 탓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마에게>를 보며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동정심은 매우 경계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저들을 동정할 수도 안타까워할 수도 없다. 우리는 저 상황에 있어본 적도 없으며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어라고 그들을 동정하는가.


 동정심이 오만함의 다른 표현이라면 영화는 그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사마에게>는 내게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동정심과 절망감을 유발하는 차이를 거리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마에게>는 매우 가까운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이 알레포의 가운데에 서있는 모습은 이 영화가 가장 혼란에 가까운 곳에서 찍힌 것을 증명한다. 이 카메라 앞에 펼쳐진 풍경은 재현된 것도 아니며 재현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실재하는 것이고 실재하는 것을 찍었을 뿐이다.



 ‘사마’가 나오면 영화는 정지된다. 내내 보아온 참담한 풍경이 주는 광기와 절망감에 순간에도 ‘사마’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 영화는 정지가 되는 것 같다. 폭격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만 같고, 건물은 안전할 것 같으며, 사람들은 더 이상 다치지 않을 것만 같다. 이어서 들려오는 폭격 소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오라는 것처럼 영화로부터 있던 우리를 현실로 복귀시킨다. 공존하면 안 될 두 모습이 공존할 때의 절망감은 가중되고 우리는 다시 한번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저 사마의 미소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눈을 감아버릴 것인가.



 전쟁을 멈추게 만들 것만 같은 사마의 미소는 여태 <사마에게>에서 느낄 수 없던 다른 영화적인 감정을 유발한다. ‘책임감’일까. 감독은 이 영화를 사마를 위해 만들었다. 그럼 우리는 이 영화를 왜 봐야 할까. 그 역시 같은 답이 나오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관객은 이 영화를 사마를 위해 봐야 한다. 저 미소를 지키기 위해, 저 비극을 막기 위해 우리는 봐야 한다. 무엇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가 희미해진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한번 그럼에도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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