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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안 Jan 17. 2020

기억에서 벗어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어떤 사람에게나 ‘기억’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기억하는 자신에 의한, 자신에 관한, 자신을 위한 방식으로 구축된다. 또한 ‘기억한다.’라는 행위는 당시의 시간을 기억이라는 감각의 일부로 변환하며, 그때의 ‘시간’을 하나의 ‘기억’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기억하는 일은 시간을 기억으로 변환하는 행위로, 우리가 사진을 찍고, 영화를 만들며,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은 필연적인 한계를 갖게 된다. 기억 속의 대상에 대해 묘사하면 할수록 그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옛 연인을 기억할 때 ‘이상한 사람이었어. 제멋대로 하길 좋아하고 나를 제대로 이해해주지도 않았지.’라고 묘사한다면 그 표현은 그 사람의 전부가 될 수도 그 사람의 본질이 될 수도 없다. 우리는 누구나 이상하고 제멋대로하길 좋아하며 타인을 이해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그런 표현은 의미 또한 없다.(생각보다 이런 식의 성격 묘사는 실재와 모순된 경우도 많다.) 이런 명확한 표현은 도리어 자신의 기억에서 그 대상의 형태를 고정시켜 대상이 유발하는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위가 되어버린다. 즉,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묘사하는 것뿐 그 대상을 온전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기억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내 멋대로 정의된 사람들이며 내 멋대로 대상화된 형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그 대상들은 주체성도 없고 독립성도 없으며 그저 객체로만 두둥실 떠다닐 뿐이다. 여담으로 이렇기에 우리가 외로운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오르페우스 이야기와 화가와 모델 관계를 비틀어 주체성과 객체성의 경계를 비틀고 허문다. 화가의 시선과 모델의 시선을 동일한 선상으로 올려서 일방적 관계가 아닌 양방향적인 관계로 만들고, 오르페우스 신화를 비틀어 에우리디케의 선택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영화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주체와 객체를 나누어왔던 경계선(오르페우스, 에우리디케/화가, 모델)을 뒤집으며 생명력을 더해간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영화는 영화가 스스로 전제한 마지막 경계를 비틀기 시작한다. 회상으로 구현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필연적으로 회상을 하는 자의 시선에서 구성되고 재생된다. 따라서 자의적이기 않더라도 기억 속 자신을 제외한 인물들은 기억의 객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본 엘로이즈는 결국 마리안느의 기억을 투영해 본 객체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필연적인 한계를 수반하게 된다. 그렇기에 영화는 마지막으로 전제된 기억의 한계선에서 엘로이즈만의 영역을 구축한다.



 영화의 결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과연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기억’이라는 틀 안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한다. 영화는 끝까지 마주치지 않고 눈시울을 붉히는 엘로이즈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엘로이즈의 눈물을 빤히 바라본다. 하지만 영화는 엘로이즈의 눈물 뒤로 있을 엘로이즈의 생각이나 감정을 읽지 않는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추억하는 것인가. 아니면 마리안느를 쳐다보지 않으려 참는 것인가. 우리는 그 답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없다. 영화도 그 너머를 섣불리 단정하지 않는다. 마리안느의 회상으로 묶여있는 마지막 엔딩 장면의 감정은 마리안느의 것도, 관객의 것도 아닌 엘로이즈만의 것이다. 영화는 그 장면에서 엘로이즈의 감정, 시선, 눈물, 생각을 묘사하지 않는다. 묘사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리안느의 붓질로 그어진 선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엘로이즈의 얼굴에 어떠한 개입을 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본다. 영화는 자신의 무지의 시선을 통해서 엘로이즈의 공간을 마련한다. 그곳에서 엘로이즈는 무슨 생각을 해도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자신만의 공간인 것이다.     


ps.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말할 때 꼭 이 장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이를 밴 소피가 아이를 지우기 위해 마을의 어떤 할머니를 찾아가고 낙태를 하는 장면. 아이를 낙태하는 이 장면에서 마리안느는 보기 힘들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려고 하지만 엘로이즈는 이 모습을 보라고 말한다. 소피가 낙태를 끝내고 침대에 널브러져 누워있다. 그리고 소피의 옆으로 아기가 함께 있다. 소피는 옅은 미소를 띠며 아이의 뺨을 어루만진다. 낙태와 함께 배치한 아기의 존재는 낙태로 인해 지워진 존재가 이 영아와는 다른 존재임을 암시한다. 만약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면 소피는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을 것이니 말이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엘로이즈는 마리안느 앞에서 그 장면을 다시 재현한다. 그리고 마리안느는 그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금지된 그림으로, 금지된 행위를 화폭에 담는다. 그리면 안 되는 것을 그리는 것.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예술이 되어 하나의 목소리로 간직된다. 예술은 그렇게 역사를 타고 기록되며 이어진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역시 그에 대한 연장선이 될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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