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안인에서 동해 망상까지 걸었던 백패킹의 기억
5월이면 한없이 걷고 싶어 진다. 언제라도 걷기는 생각에 잠기게 하고, 복잡한 것들을 사라지게 하고, 건강을 선사해 주는 멋진 일이지만 5월의 걷기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더이상 바람은 차갑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푸른빛이다. 거리의 가로수마저 생기 넘치는 상큼한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초록 잎사귀 사이로 하얀 꽃들이 피기 시작하는 5월에는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꽃향이 이리저리 날린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부드럽고 시원한 바람 사이로 오가는 꽃향기는 걷는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니 5월의 걷기는 얼마나 특별한지. 걷기가 특별해지는 5월이니 백패킹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달이다. 겨울 백패킹은 침낭도 두텁고, 방한 용품 등 챙겨야 하지만 5월의 백패킹부터는 배낭의 무게가 겨울에 비해 가벼워진다. 그 가벼움은 좀 더 먼 곳까지, 좀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해 준다. 그러다 보면 그저 한없이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 짐을 메고서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
우리는 첫 기차를 타고서 강릉으로 가기로 했다. 걷고 싶은 길이 강릉에 있었기 때문이다. 강릉을 둘러싼 높은 산들부터 해안까지 구석구석 이어진 강릉 바우길도 걷고 싶고, 여러 도시를 아우르는 동해의 해파랑길도 걷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코스는 정동진이 내려다 보인다는 강릉 바우길 8코스와 바다로 연결되는 9코스를 걷다가 해파랑길 34코스로 넘어가서 망상해변캠핑장까지 목표로 하고 오늘은 그저 한없이 걷기로 한다.
강릉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 40분쯤 달렸을까. 강릉바우길 7코스 구간 종점이자 오늘의 걷기 코스인 8코스가 시작되는 안인삼거리에 도착했다. 안인에서부터 괘방산을 지나 정동진 역까지 약 9킬로 정도 산길로 이어지는 8코스는 산우에 바닷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산과 바다라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과연 산우에 바닷길이라는 이름답게 8코스는 아름다웠다. 초입의 경사진 계단을 오를 때는 숨이 차고 힘들었지만 숲의 초록 그늘과 간간이 보이는 동해 바다는 힘든 것을 잊게 해 주었다. 특히 정상까지 가는 길에 만났던 활공장은 멋진 쉼터였다. 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는 것. 이것이 바로 등산의 즐거움이지. 무거운 배낭은 잠시 내려놓고 드넓은 파란 바다를 앞에 두고 그저 앉아만 있어도 마음이 넉넉해지더라.
산에서 만나는 이정표는 늘 반갑다. 활공장을 지나 얼마쯤 가니 괘방산 정산이 나왔고 좀 더 가다 보니 정동진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그렇게 부지런히 걷다 보니 어느새 정동진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길을 4시간 정도 걸었나 보다. 힘들었지만 한 코스를 마쳤다는 생각에 무척 뿌듯해졌다. 그리고 이내 배가 고파와서 우리는 역사 근처 식당에서 순두부를 먹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먹었으니 다시 시작이다.
정동진에서 옥계까지 이어지는 강릉바우길 9코스는 헌화로를 따라 걷게 된다. 헌화로는 동해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해안도로로 유명한 곳이다. 실은 헌화로가 들어있는 9코스는 이번 백패킹에서 제일 걷고 싶은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헌화로는 쉽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정동진역에서 언덕을 넘어 한 참 걷다가 중간에 산길도 들어갔다가 꽤 오랫동안 걸어간 후에야 심곡항을 만났고 그제야 헌화로가 얼굴을 내밀었다. 한참을 걸어와서인지 좀 쉬어가기로 했다. 심곡항 주변에 벤치에 앉아 일단 숨을 가다듬고 지친 발을 쉬게 한다.
신발끈을 고쳐 메고 헌화로 구간을 진입했다. 바다를 바로 옆에 두고 걸으니 포말이 바닷바람에 날려 얼굴을 스친다. 파도와 바위가 만나는 속닥이는 소리 또힌 무척 정겹게 들려온다. 거기다 오가며 만나는 분들이 우리에게 힘내라며 박수를 보내준다. 이름 모를 사람들의 미소와 응원의 메시지에 마음이 따듯해진다. 신기하지. 큰 배낭을 메고 걷는데 그게 뭐라고 우릴 보는 사람들은 따뜻한 파이팅을 보내준다. 뭔가 마음에 뭉클한 감동이 일었다.
뭔가 새롭게 시작하거나 도전하게 될 때 "이게 될까?" 그러다 "어. 진짜 이게 된다고?" 하는 순간이 있다. 이날의 걷기가 그런 순간이었다. 목적지는 안인에서 망상까지로 잡았지만 강릉바우길 8코스가 끝나고서는 발도 아프고 지쳤기 때문에 가다가 힘들면 버스나 택시를 타려고 했다. 그런데 좀 더 걸어보고 싶은 마음, 저기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9코스도 완주하고 해파랑길 34코스를 걷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와중에 뭔가 달콤한 향기가 우리를 돌고 나간다. 고개를 들어보니 사방이 온통 아카시아 나무였다. 힘들고 지친 순간의 달콤한 꽃향기는 마음에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멀리에 망상해변이 아스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걸었을 뿐인데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찾아들었다. 간절히 바라는 마음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번지는 순간이었다.
어둑어둑 해가 질 무렵, 드디어 망상해변캠핑장에 도착했다. 서쪽 하늘에 황금빛 노을이 번지고 해변엔 해당화가 소담히 피어 여행자를 환영해 주었다. 집을 떠난 지 열다섯 시간 만에 오늘의 보금자리를 만들러 온 여행자를 반기는 것은 꽃뿐만 아니라 잔잔한 바다와 모래 위에 뿌리를 내린 푸른 풀도 함께였다. 우리는 텐트를 치고 근처 식당에서 물회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서둘러 텐트로 돌아와 쉬었다. 아주 길었던, 감사한 하루가 그렇게 저물었다.
새벽엔 비가 지나갔다. 잠결에 후드득후드득 빗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텐트에 맺힌 빗방물만이 영롱하게 남아있었다. 새벽에 내린 비가 그치고 나자 상큼한 풀향기가 공기 중에 퍼졌고 그 덕분인지 개운하게 세수를 한 것처럼 상쾌했다. 천천히 걸으며 전날 무리했던 근육들을 살살 풀어주고 해변가에 가서 아침 해를 기다렸다. 해가 뜨기를 기다리며 전날보다 파란빛이 진해진 하늘과 바다를 눈에 담는다. 그리고 지나온 시간과 남을 일정을 생각해 보았다. 그저 걷고 싶어 걸었고 지칠 때 쉴 수 있었고 이젠 다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오전엔 바다를 보며 카페에서 여유를 좀 부려보다 묵호역 근처에서 유명하다는 장칼국수를 먹고 동해 시내를 좀 걸었다. 원래는 동해선 철길 아래 자리한 한섬해변이 아름답다고 해서 거기까지 걷기로 했는데 정오 넘어 출발하는 서울행 기차를 타기엔 시간이 빠듯할듯하여 한섬해변을 지나가는 해파랑길 33코스를 다음 여행지로 남겨두었다. 뭔가 다음을 기약하는 일은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기에 희망적이다. 나는 그렇게 떠나는 곳에 하나의 희망을 남겨두었다. 기차는 두어 시간이면 다른 세상으로 나를, 우리를 데려다 놓겠지만 한없이 걷고픈 마음으로 도전하고 응원받았던 기억들은 오랫동안 남아서 다시금 이곳을 찾게 하겠지. 미처 못 가본 해파랑길 33 코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언젠가 다시 기차에 오르게 될 테니까. 그렇게 걷고 싶을 때는 백패킹을 떠나자.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고 그리운 곳으로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