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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소댕 Jan 29. 2024

충동적으로 오클랜드행 비행기를 사버렸다.

삶의 통제력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호주에 온 이후로 삶이 탱탱볼처럼 제멋대로 튕겨진다. 한국에서는 어느정도 하루의 길이를 짐작이 가능했다면, 시드니에서는 오늘 저녁 메뉴조차 정확히 모른다는게 문제. 통제광 J한테는 조금 버겁다. 시간 관리란 인생 평생 떼놓을 수 없는 과제였는데 그렇다보니 과할 정도로 갓생에 집착해 저녁에 운동을 못가는 날에는 무조건 새벽 운동을 나갔고, 약속도 데이트도 내 입맛에 맞춰서 조율해왔는데 호주에서는 내 뜻대로 따라줄 필요가 없는 인간관계이다보니(?) 내가 어느새 그들의 스케줄에 맞춰져 나가는게 왠지 불만이 생긴다.


그래서 다시 삶의 주도권을 갖겠다는 마음으로 선택을 한 것이 오클랜드 행.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말은 하지만 진짜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항상 쉐어 하우스며 주말이며 주변에 사람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시드니 생활이다보니 국경일을 끼고 있는 Australia Day에 맞춰 롱 위켄드 겟어웨이를 계획했는데, 사실 가기전 날까지 갈팡질팡 엄청난 고민을 하느라 짐도 싸지 않았다.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전체를 보낸 도시이기 때문에 큰 설레임보다는 익숙함이 가득한 곳이라 12년 만의 방문이지만 삶의 방향성을 다시 찾기에 명분이 좋다. 조금 외롭고 쓸쓸한 도시라 더 그럴지도 몰라. 저녁 7시가 훌쩍 넘어 도착한 곳은 금요일 밤인데 지나가는 사람들 조차 괜히 숨을 죽이며 지나간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버린거지. 예전에는 그래도 주말이면 활기가 넘쳤는데, 메인 거리인 퀸 스트릿 조차도 클로징 사인이 걸린 가게들이 대부분이고, 닫힌 가게 문 앞에는 회색 거리에 은밀히 노숙인들이 몸을 누위고 쉬고 있다. 삶의 방향성이고 뭐고 한때는 나의 고향처럼 생각했던 곳이 이런 고스트 타운이 되어버리다니 현실을 부정하며 구석구석 한때는 북적였던 곳들을 애써 찾아가봐도 실망만 가득해버린다.


이러니 다들 호주로 이민을 와버리는건가 다시 한 번 씁쓸함이 입을 가득 머물다 밤에 맥도날드나 사서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곧 결혼할 친구 M과 만난다. 자주 보진 못해도 오다가다 한국에서 한번씩 시간내 만나곤 하던 고등학교 미술학원 친구인데, 동글동글 귀여운 얼굴에 성격도 모난데없이 둥글다. 싫고 좋은게 분명해 오히려 너무 마음에 드는 친구라 지난 안부와 결혼 준비, 새로 만나는 사람 등 두시간을 조잘조잘 떠들다 준비한 선물을 들려보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새로 나온 아이유 신곡 뮤비를 보는데, 왜 눈물이 자꾸 나는지 몰라. 사랑이 물리적, 정신적 차원을 넘어가 모든걸 이겨낸 절절한 세월을 보낸 한 쌍의 커플의 아름다운 추억을 보는 듯 해서 또 다시 지긋지긋하게 전 남자친구 생각에 빠져서 눈물을 흘리다 배가 고파져 맥도날드나 사러가야겠다고 일어난다. 뉴질랜드와 호주는 바로 옆 나라이지만 음식이나 커피는 뉴질랜드가 조금 더 낫다. 아직 멜버른 커피를 마셔보진 않았는데, 풍미로만 보면 좀 더 깊은 맛이 느껴지고 하다 못해 맥도날드도 조금 더 퀄리티가 괜찮은 정도. 코로나 이후로 물가가 미쳐돌아 간다더니 다시 한 번 새삼 비싸다하며 치즈버거와 맥 치킨을 입 안 가득 베어문다. 배가 차니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지네.


남은 하루 반도 어떻게든 잘 보내봐야지 생각하면서 잠을 설치다 저녁에 친구와 약속을 잡고 남은 시간동안 오클랜드 다운타운 항구에서 페리를 타고 와이헤케 섬으로 들어가 Mudbrick 와이너리 투어를 한다. 홉 카드 충전해 왕복으로 60불 이것도 너무 비싸! 다른 방법이 없으니 대충 호주 카드로 결제를 하고, 페리에 내려 버스를 타는데 페리에서부터 쫒아온 키 크고 몸이 다부진 남자가 와서 영어를 할 줄 아는지, 마음에 드는데 남자친구가 있는지 물어온다. 굉장히 예쁜 올리브색 눈을 빤히 보다 더 이상 대충 남자친구 있다고 얼버무리고는 젤라또를 먹을까하다 줄이 너무 길어 포기하고 곧장 와이너리로 향해, 테이스팅 메뉴를 신청해 화이트 2잔, 레드 4잔에 알딸딸하게 취해버려 기분좋게 나온다. 역시 나는 입 안이 깔끔한 화이트가 취향이야. 그냥 페리까지 걸어버리자 생각하고 뚜벅뚜벅 음악을 걷는데, 포도나무가 잘 다듬어진 와이너리도 예쁘고 걷는 이 길도 예뻐버려 기분이 좋아지네. 단순하다 단순해. 역시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냥 이렇게 흐르는 물처럼 공기처럼 살아버리자 뚜벅뚜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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