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심리학 (3): 헤파이토스
앞선 글에서 근대(모더니즘)의 합리주의와 이에 반발하는 후기 근대(포스트 모더니즘)를 언급했습니다. 사실 인간이 합리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논쟁은 비단 서구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표현만 달랐을 뿐 오랫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본성)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오랜 철학적 논쟁과 탐구가 이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외부의 자극, 즉 환경적 조건에 반응하는 존재인데 이때 외부의 자극 또는 환경적 조건은 단일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 다양해서 그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이를 거칠게 표현하자면 원초적 능력이자 아직 채 여물지 못한 능력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는 본능에 바탕을 두고 학습을 통해 어떤 공통적이거나 주관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기억 속에 저장한 뒤 이에 기대어서 환경적 자극에 반응하게 되는데 때에 따라서 같은 또는 매우 흡사한 환경적 자극에 노출될지라도 그간의 학습의 경험과 그렇게 학습된 기억의 내적 재조직화를 통해 좀 또는 사뭇 다른 반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때 반응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외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당사자만은 느낄 수 있는 내적 반응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내적 반응이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우선 알차적으로 주어진 외부 자극을 좋아서 주목하고 싶다 또는 불쾌해서 피하고 싶다는 반응이 제일 앞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그것이 가능한지 아니면 불가능한지 여부와 함께 어느 정도까지 그것이 가능한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불쾌한 자극에 대해 회피하거나 주목할 수는 있지만 그 소유가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리면서 그 불가능한 행동을 시도하려 한다면 마치 얼이 빠지는 듯이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정신은 마치 꿈결 속을 헤매듯이 멍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런 일련의 정신적 심리적인 자연스러운 내적 반응을 마치 뇌혈관이 경색되듯이 가로막아서 그 결과로 신경질적이고 불유쾌한 마음의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사회적 문화적으로 사실상 강요되어 세뇌된 사회적으로 소유된 가치, 즉 규범이나 도덕 또는 윤리라는 멋져 보이는 외양을 가진 사회적 초자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렇게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초자아와 양심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고 말이지요. 우선 그에 대한 제 견해부터 밝히자면 양심이 가진 선천적인 속성을 초자아는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해서 양심에는 자기 이해가 가능한 반면 초자아는 자기 이해가 아니라 외부에서 주입된 명형이나 지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기 이해는 내가 왜 그런 감정이나 욕구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파악하는 능력으로서 이 이해를 바탕으로 외부의 주어진 조건과 환경을 고려할 때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지, 그렇다면 어느 선까지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를 판단하는 기초가 됩니다.
반면 초자아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강압적 명령을 그 시작점으로 하여서 자기를 이해하고 표현하려는 욕구를 금기시하거나 방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초자아와 양심이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이기만 한 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설사 초자아적인 성질의 윤리적 명령이더라도 그 윤리적 명령에 대해 왜 그 명령을 따라야 하는지 그리고 그게 어떻게 얼마나 가능한지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다면 어떤 초자아적 명령은 폭군과 같은 강압적 성질을 잃고 온순하게 양심에 편입될 수도 있습니다. 이 현상을 "내면화"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초자아 개념이나 라캉의 소타자 개념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띄는데 그 이유는 우선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말해서 세상의 도식적이고 갑갑한 설명이 아니라 선천적인 인간의 성질에서 기원해서 그 선천적인 성질과 융합되는 학습, 달리 말해 일상 속 경험을 바탕으로 한 깨달음을 통한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소화해서 내가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한 "나 자신의 윤리"로 만들었는가 여부에 따라 이전에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게 하는 폭군과 같이 폭력적인 초자아의 명령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유연하고 부드러운 성질의 양심에 자연스레 편입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초자아와 양심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은 가능한가 아니면 불가능한가 여부인데 이 기준이 사람을 두렵게 만들고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고 심지어는 사람을 녹초로 만들어서 마치 무거운 돌덩어리에 짓눌린 듯이 사람을 한없는 무기력 상태로 빠뜨려서 그 병적인 무기력감 때문에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심하고 병적인 불안과 함께 그렇게 무기력하고 불안한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고된 삶으로 인해 지친 사람에게 잠시 손을 건네듯이 떨군 머리와 꺾인 허리를 다시 펴게 만드는 가를 가르는 기준은 다름 아닌 가능성, 그것도 씨앗의 형태로 어떻게 꽃이 필지는 정확히 알 순 없지만 키우고 싶다는 선천적인 욕구가 실현되려는 것을 촉진하는가 아니면 가로막는가 여부에 따라서 초자아와 양심을 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멋대로 또는 의지로 바꿀 수 없는 마음의 상태나 변화 때문에 불안하고 화가 나서 그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는가 아니면 그 마음의 상태나 변화를 이해하고 납득하고 인정하는가로 초자아와 양심을 구분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