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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Apr 07. 2022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심리학 (1)

고대 그리스 로머 신화에는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서 모든 이에게  사이즈가 맞는 침대가 있다며 그 행인을 눕힌 다음 침대보다 키가 크면 남는 다리를 잘라버리고,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침대 길이에 맞춰 늘려버리는 방법으로 상대를 살해한 강도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어느 날엔가 침대의 길이와 똑같은 키를 가진 세우스가 나타나서 프로크루스테스를 같은 방법으로 죽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어랄 적부터 공증에 붕 뜬 듯한 느낌의 신화나 동물아 등장하는 동화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유학생활을 하던 어느 날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이야기가 어쩌면 인간인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은유이자 상징으로서 일종의 경고 문구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저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서 다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복잡한 암호를 해독하는 듯한 기분으로 말이지요.


정신질환 중에 "해리성 장애"라는 것이 있습니다.  몇 년 전  해리성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도 있었는데 해리성 장애란 간단히 말해서 특정인의 인격의 여러 측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공존하지 못하고 마치 어느 연극에서 한 배우가 여러 사람의 역할을 하듯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데  질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정체성", 즉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질문을 좀처럼 스스로에게 던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나 자신의 싫고 좋음, 그리고 항상 객관적으로 옳을 수는 없지만 나 자신의 주관적인 신념으로서의 옳고 그름, 즉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개방되어 있는 굳센 신념"과 관련된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 마음으로부터 들려오는 절박한 잘문일 수는 있습니다. 물론 혼자서 살 수 없고 나와 다른 취향과 나와 다른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사람들, 게다가 사회경제적으로 층이 나뉘어 있는 인간관계 때문에 때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나의 개성과 취향에 대한 자기주장을 접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이때 중요한 점은 그렇더라도 처한 환경 때문에 실현시키지 못한 또는 표현하지 못한 나의 욕구와 감정이 여전히 그리고 오롯이 나 자신의 고유한 욕구와 감정이라는 사실을 정직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려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게 당연한 얘기지"하실 분도 계실 텐데 그래서 설명을 조금 더 보태자면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인 고유한 취향과 관심에 바탕을 둔 욕구와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면 때로는 비아냥이나 비난; 때로는 한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집단적 가치관 때문에 윤리적으로 비난당할 수 있고 그래서 밖으로 그런 욕구나 감정을 표현하기 힘들 뿐만 아니자신이 그런 욕구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용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진짜 욕구와 감정을 무시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건 내 감정이 또는 내 욕구가 아니야, 인정할 수 없어"하면서 동시에 자기가 추종하고 싶은 무리가 공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에 차서 짐작하는 "집단적 욕구나 감정을 자기 자신에게 억지로 강요할 도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프로 크루스 테스의 침대가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집단적 욕구나 감정"을 가리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유된 집단적 욕구나 감정의 실 소유주는 과연 누구일까요? 물론 그 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최고 위치의 갑의 욕구나 감정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암시된 욕구나 감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암시란 광고,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대중가요처럼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어느 특또는 특정 집단이 자신의 주관적인 세계관과 치관에 기반해서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 또는 대중가요 같은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 그 시대의 약점이나 불편함을 없애 준다는 메시지를 은근히 의식하지 못하게 하면서 퍼뜨리는 성질의 암시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런 암시된 메시지가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거나 감정이나 욕구의 자연스러운 생성과 변화의 모습들 중에서 마치 "찰칵"하며 사진을 찍듯이 어느 특정 순간만을 부각함으로써 욕구나 감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생명력, 비유하자면 그 생생한 숨결을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론 행복한 순간을 사진으로 찍을 때 그건 그저 한 순간일 뿐임을 자각한다면 그런 은밀한 암시에 걸려들지 않겠지만 그런 암시로 인해 도취된 상태에 빠지거나 흐르는 강물을 막아 보려는 듯이 억지를 부리면 역으로 마음속에 불러일으켜진 감정이나 욕구는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멈추게 되고 그 자리에 초조함, 불안 그리고 짜증이나 우울 같은 힘든 감정이 들어서게 될 위험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게다가 암시된 정서나 욕구는 순간적으로 흐뭇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더라도 온전한 "나의 감정이나 욕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흐뭇한 반응은 암시적인 자극이 사라진다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뿐더러 마치 아무리 맞추려 해도 맞지 않는 퍼즐 조각처럼 이질적이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순 없지만 마음속에 이상하고 불편한 감정도 불러일으키면서 말이지요. 어쩌면 그건 상상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을 볼 때 느끼는 비현실적 이질감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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