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하는 이유 그리고 그 말을 이해하는 방식
뜬금없는 말로 비칠지 모르는데 인간관계가 어려운 이유는 서로 간의 다른 취향이나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 때문이겠지만 이를 밖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와 그 언어(말)를 해석하는 상대방의 주관적인 인식 틀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말을 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사람의 해석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무심코" 뱉은 말이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한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로는 상대방이 처한 현실적 조건들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내적 조건, 즉 일시적으로나마 존재하는 마음의 상태를 고려해서 말하지 않고 자기의 입장,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해서 어디선가 "그렇게 해야 한다" 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라는 내용을 머릿속으로만 수용해서 곤란한 처지에 놓인 상대방을 위한답시고 그 표현을 꺼내서 그렇지 않아도 힘든 상대방을 더 힘들게 하고 때론 화도 나게 해서 원치 않게 서로 얼굴을 붉히면서 말한 사람은 "왜 내 마음을 몰라 주나"하면서 상대방을 원망할 수 있고 그 상대방은 "안 그래도 힘든데 왜 불난 집에 부채질이야"하면서 말을 꺼낸 상대방에게 잔뜩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제가 젊은 20대일 때 동아리 여자 후배가 취업 때문에 속앓이를 하다가 극적으로 외국계 회사에 정직원으로 채용되었고 어느 날 무슨 일로 그 후배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여자 후배의 입을 통해 나온 말 때문에 잠시 정신이 멍해진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은 "아직 취업하지 못한 후배나 동기에게 반드시 취업에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분명히 좋은 직장애 채용될 것이라고 말할 거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저는 그 말애 뭔가 오류가 있다는 확신에 찬 의혹이 들었지만 소용도 없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저 "응"이라고만 대답했습니다. 그 후배와 헤어진 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저는 그 아이가 밖으로 꺼낸 그 말에 왜 확신에 찬 의혹이 들었는지 생각해 보았는데 우선 아직 전전긍긍하면서 이곳저곳에 취업 서류를 제출하거나 서류전형에 합격해서 필기시험이나 면접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확률적 조건들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낙관적으로 "반드시 취업에 성공한다"는 믿음을 가질 수 없고 제 귀에 기적처럼 취업에 성공한 그 후배의 말이 오만한 자기 자랑처럼 들려서 그런 의혹이 들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처했던 불안하고 막막한 상태를 바탕으로 아직 취업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마치 승자의 지위에 올라선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우쭐대는 식의 경박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언어라는 것이 자연이 인간에게 준 큰 축복이지만 마치 칼이 음식을 조리할 때 팔요한 유용한 수단이거나 자기를 지키는 방어수단이 될 수도 있고 남을 위협하거나 해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언어 또한 사람을 도울 수도 있고 그 반대로 해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점은 언어란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현상을 가리키는 중요한 수단인데 그 가리키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언어는 반드시 어떤 것과 다른 어떤 것을 구별하면서 대상과 현상을 그 언어 속에 담아 한정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대상이나 현상을 구별할 때 언어로는 완전히 담을 수 없는 대상이나 현상의 다른 측면들, 특히 눈에는 띄지만 밖으로 표현할 수 없는 측면들을 굳이 언어라는 수단으로 가리키려고 하지 않고 그저 감각적인 인식의 틀에 들어온 "외적 정보"이자 "비언어적으로 처리된 정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도 내포라고 있습니다. 그제야 언어로 포착될 수 없지만 가리킨 언어가 어떤 뉘앙스를 풍기는지 상대방에게 원시 언어, 이를테면 말투, 표정, 제스처 등을 통해 전달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그 말을 한 사람의 속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될 텐데 말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이해한 바를 언어로 고스란히 표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때 우리는 그저 "응, 그렇구나" 또는 "그래서 그랬구나"하며 말로는 제대로 옮길 수 없는 마음의 결, 즉 (어느 정도) 공감했거나 납득했다는 것을 막연한 언어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언어는 그런 지시적 기능을 통해 인간의 마음, 즉 감정이나 욕구를 제한적으로나마 가리킬 수 있는데 이때 그 말을 직조해서 사용하는 동기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쓰는 표현인데 우리는 종종 "인지 정서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인지 정서적"이란 우선 옳고 그름 또는 싫고 좋음의 판단을 했더라도 상대방의 처지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 판단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도 함께 살핀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상대방의 처지나 상황에 대해 제한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정보를 기억에서 불러내서 인지적 판단과 저울질해 보아야 할 텐데 사람인 이상 완벽하게 타인의 상황이나 처지, 그것도 지금의 상황이나 처지를 모두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심했더라도 때로는 의도치 않게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자연스러운 미안한 마음이 들게 되기도 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상대방에게 넌지시라도 미안함을 표현하거나 오해가 있었음을 밝힐 수 있지만 물론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점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고 이런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데도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언어에 진심을 담는다는 것은 억지로는 할 수 없고 다만 우선 자신의 정직한 마음을 고스란히 인정한 뒤 상대방을 고려할 때 그 마음의 내용 중에서 밖으로 표현해도 괜찮겠다는 또는 좋겠다는 판단이 드는 내용만을 상대방에게 전하려고 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엉뚱한 상상이지만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실실 웃거나 심지어 비꼬는 듯한 표정이나 태도를 보인다면 이를 보고 들은 사람은 그 미안하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게 될까요? 겸연쩍은 웃음이 아니라 누가 봐도 놀리는 듯한 어투나 표정을 볼 때 말이지요. 이때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미안하다는 말에 진정성이 없을뿐더러 상대방의 속을 더 긁을 목적으로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건 너무 뻔한 설명일 것입니다. 이때 말은 가리키는 기능, 즉 솔직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기능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조롱과 비아냥거리려는 의도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그리고 속마음에 의도된 욕구는 쓰이는 언어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때로는 특정하게 의도한 내용의 말이 채 의식하지 못하고 밖으로 꺼낸 말과 어울리지 못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종잡을 수 없거나 채 의식하지 못한 말 때문에 무슨 의도로 말을 하는지 들키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좋은 엄마" 또는 "좋은 자녀"에 대한 두루뭉술한 내용을 접하기도 하는데 그건 "좋은 엄마"란 또는 "좋은 자녀"란 이렇게 행동하는 존재이다"라는, 마치 예를 들어 전기밥솥이나 컴퓨터의 사용 설명서 같은 내용일 것입니다. 물론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동기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 정보에 관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문제는 어떤 의도된 행동이 어떤 마음에서부터 비롯되었고 그다음으로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까라는 판단이 선행되는, 절대로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일련의 정신적이자 심리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동기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간과해서는 안 될 텐데 이를테면 "자녀의 행복"이라는 두루뭉술한 의도 속에 담긴 구체적인 의도, 예를 들면 "내 아이가 좋은 성적을 얻어서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그에 따라 좋은 직장애 들어가기를 바란다"는 절대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면 자녀를 거의 그쪽 방향으로만 몰고 가려는 행동을 나타낼 수 있고 가치판단적인 경우를 들면 "유명한 선생님께서 아이에게 엄마의 속 감정, 즉 화나 짜증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으니 절대로 화나거나 짜증 나는 티를 아이에게 보이지 말아야지"라는 의도를 가진 엄마는 그쪽으로만 거의 대부분의 신경을 쓰게 되어서 정작 신경을 써야 할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엄마에게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보호와 돌봄의 느낌, 즉 정작 아이가 중요하게 필요로 하는, 비언어적으로 전달되는 엄마의 느낌 말이지요.
그래서 마치 기계 제품 사용 설명서 같은, "~ 해야 한다"는 지시적인 내용을 접하면 우선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와 더불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이때 어떤 특정한 상황들과 맞물려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빼먹지 말아야 할 점은 그 특정한 상황들 속에서 본인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이나 욕구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점인데 그 이유는 흔히 좋은 엄마란 자기 속내, 즉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합리적이고 차분하게 자녀를 대하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그 정직한 감정이나 욕구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원치 않게 그 감정과 욕구가 이상한 방식으로 드러나서 들킬 수 있고 때로는 과장된 연기를 하는 듯 할 때 정직한 그 감정과 욕구는 더 심하게 때론 날 것 그대로를 드러낼 때보다도 더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거나 두렵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아이가 엄마가 마치 연극배우처럼 연기를 하고 있다는 낌새를 눈치채는 것뿐만 아니라 엄마가 자신의 정직한 감정과 욕구를 억지로 억누르다가 갑자기 폭탄이 터지듯이 어느 순간 폭발해 버리면 아이는 그 일련의 과정을 학습해서 다시 엄마가 연극하듯이 과장된 연기를 하면서 아이를 대할 때 아이는 오히려 엄마가 곧 어떻게 행동하겠구나를 예상하게 되어서 지레 겁을 먹고 긴장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놓치지 말아야 하는 점은 엄마의 마음속에서 저잘로 일어나는 감정이나 욕구를 날 것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그저 자신의 마음의 상태임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그저 누구의 지시나 교과서 내용을 따르듯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과 욕구가 불러일으키는 자신의 생각 또는 주장이나 견해를 아이에게 명령조가 아닌 대화체로 얘기하면서 그 주장이나 견해와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 정서나 욕구를 적정한 선에서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 말씀에 고개를 갸웃거리실 분이 계실지도 몰라서 굳이 덧붙이자면 제가 엄마의 "견해" 또는 "주장"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자녀에 대해, 특히 자녀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엄마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자기 자녀를 사실상 감시하면서 꼬치꼬치 간섭하고 통제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자녀가 어리고 그래서 여러 면에서 아직 서툴더라도 한 개인으로서 자신만의 감정이나 욕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 자녀도 어른의 눈으로는 시시해 보일지 몰라도 자신 앞에 닥친 또는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욕구도 가진, 엄마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점을 밝히고 싶어서입니다. 따라서 어른들처럼 어떤 일을 하다가 싫증을 낼 수도 있고 때로는 과부하가 걸려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지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가 제 멋대로 하도록 무작정 내버려 두어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의 내부 규칙을 세우고 따를 것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그건 옆에서 일일이 자녀의 행동들을 간섭하고 통제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리고 이런 지나친 간섭과 통제가 위험할 뿐만 아니라 해로운 이유는 차츰차츰 과하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능력인 자율성, 특히 시행착오나 실수를 통해 끊임없이 구체적인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나아가 세상을 조금씩 더 배워 익히는 자율성을 기를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해서 그 결과 엄마의 전적인 돌봄과 보호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게 되는 시기가 오면 혼자서 문제를 처리할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아이의 눈에는 세상이 온통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만 보여서 왜곡된 자기 보존 본능 때문에 지극히 자기 본위적인 태도, 즉 자기에게만 온 신경을 쓰는 악성의 이기주의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안과 직접 마주칠 자세를 점차적으로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몹시 불안하고 무력한 자신을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보호하고 위로해 줄 또 다른 "엄마"를 찾게 될 텐데 그런 엄마 같은 여성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어서 자꾸만 실망을 거듭하게 되고 그 결과 점점 더 인간에 대한 절망감이 깊어지고 이는 인간에 대한 염세적인 불신과 혐오감을 점점 더 키울 것입니다. 끊임없는 악순환 속에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