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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Jan 03. 2022

중독, 순간적 짜릿함과 끝 모를 불안 (5)

이전에 올린 글에서 저는 프랑스 정신분석 학자인 라캉이 사용한 주이상스(jouissance) 개념을 소개드린 적이 있습니다. 향유 또는 즐긴다는 뜻을 내포한 이 개념에 라캉은 "선택"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그건 어떤 바람직한 또는 좋아 보아는 대상이나 현상을 취하고자 할 때 그에 따르는 비용 또는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종종 갈등이나 고민에 마주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어떤 좋아 보이는 것을 취하려면 예상되는 그리고 피할 수 없어 보이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식의 한계를 가진 사람이 언제나 올바를 뿐만 아니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어서 때론 후회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미처 예상치 못한 결과가 초래되었을 때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만 쉴 것이 아니라 새롭게 당면한 현실 앞에서 다시 갈등하고 고민하며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독에 걸린 사람들도 그 중독 행위에 대해 막심한 후회를 하면서 이를테면  "내가 다시 도박을 하면 나는 개새끼다" 또는 "내가 다시 도박에 손을 대면 그 순간 내 손 모가지를 잘라 버리겠다"라는 비장한 각오를 하기도 하지만 중독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그 또는 그녀는 좀처럼 중독 행위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간의 경들을 통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확률적으로 잘 일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짐작 수준이지만 어쩌면 아주 드물게 했거나 상상 속의 절정 경험, 그러니까 중독 행위를 통해서 맛보았거나 상상 속에서 맛보았던 순간적으로 짜릿한 경험 때문에 좀처럼 중독 행위를 그만 두지 못할 수도 있는데 문제는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경험한, 상대적으로 확률이 훨씬 높은 부정적인 결과를 무시한다는 점입니다. 그에 대한 가치 평가를 접어두고 말하자면 이는 금단 증상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독의 순간적 짜릿한 경험이 지나가고 나면 찾아올 부정적인 결과를 잘 알면서도 그 행위를 중단하려 할 때 찾아오는 심한 불안이나 공포 때문에 말이지요.


사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은 내에서 우러나오는 삶에 대한 질문을 무작정 회피하고 무시한 결과가 축적되어 나타났다고 봐도 그리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어느 순간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말문이 막히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삶의 방식을 버릴 수는 없다거나 꽤나 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작장이나 학교 그리고 가정에서의 고단한 삶을 내려놓고 쉬는 늦은 저녁시간에 잠을 자려고 몸을 눕혔을 때 드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 또는 처리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성가시게 여기면서 억지로 잊어버리려고 시도하는 방법으로 "정신을 빼앗기는" 행위를 자꾸만 반복하다 보면 원치 않게도 그 행위가 중독으로 변할 수 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내면에서 전하는 질문에 마땅한 답을 찾을 수 없더라도 그 질문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과 함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어도 그로 인해 고민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임을 정직하게 인정할 것을 내면에서 간곡히 요청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아픔을 주제로 한 적지 않은 대중가요에서 헤어진 연인에 대한 기억을 잊고 싶다고 절규하며 노래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련한 슬픔이 되어버린 옛 추억을 좀처럼 잊지 못해 마음이 괴롭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흔한 이별의 아픔뿐만 아니라 우리는 살면서 원치 않게 마주친 쾌하거나 두려운 경험을 잊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부정적인 경험 자체를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원치 않게"라는 표현처럼 그런 부정적인 경험은 뜻하지 않게 겪게 되는 성질의 것이고  그 불쾌하고 두려운 경험을 잊고 싶다고 해서 맘대로 잊혀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잊고 싶은 불쾌하거나 두려운 경험에 대한 기억이 모조리 기억에서 사라진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게 바람직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삶은 일직선처럼 아무런 실수나 시행착오도 겪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데 비록 씁쓸하거나 두려운 기억이더라도 기억에서 모조리 맘대로 없애버릴 수 있다면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기회"도 사라질 것입니다. 순하게 말해서 내가 이런 행동을 했더니 이런 나쁜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 우리는 삶을 다른 각도로도 바라볼 수 있고 그를 통해 실패나 실수의 확률을 줄여나갈 수 있을 텐데 이를 "성장"이라고 불러도 그리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중독은 과거의 불쾌하고 두려운 경험의 "기억"으로부터 무조건 도망치려는 시도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헛된 시도일 뿐만 아니라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행동인데 그 이유는 그렇게 무작정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 머릿속과 마음에서 짙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이 기억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한다" 또는 "이 기억을 잊고야 말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의도로 인해 그 불쾌하고 두려운 기억은 점점 더 머리와 마음속에 강하게 고착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충격적인 기억이더라도 그 기억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다 보면 정서적 기억으로서 최초의 충격적인  기억은 점점 약화되어서 처음에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그 기억을 입 밖에도 못 꺼내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조금은 덤덤히 말로 그 기억을 소환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저절로 눈물이 흐르면서 잠깐잠깐 말문이 막히기도 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중독 행위를 끊는다는 것은 중독 행위 자체를 억지로 멈추려는 시도보다 그런 중독 행위를 일으키고 악화시킨 원인을 찾아서 이제까지 회피하고 외면만 했던 그 원인과 직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리고 이런 시도에는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고통이 동반되는 끈기를 필요로 합니다. 앞서 저는 라캉의 주이상스라는 개념을 설명드렸는데 이 개념은 원치 않는 악순환적인 중독상태로부터 벗어나서 일상의 삶을 회복하겠다는 주이상스를 위해 치러야 할 정신적 심리적 비용이 존재한다는 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쭉 뻗은 고속도로와는 달리 그 시간과 끈기를 들여도 그 길이 순탄치만은 않아서 때로는 중독된 행위가 간절하게 생각나기도 하면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할 것이라는 예상된 각오를 미리 다잡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중독 행위에서 벗어난 삶 천국처럼 상상할 수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아서 적지 않은 시간과 끈기를 들여서 그 중독 행위로부터 벗어났더라도 때론 기쁘고 때론 슬프고 때론 즐겁고 때론 화도 나는 일상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어쩌면 적지 않은 실망감과 함께 차츰차츰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독 행위를 일으킨 주요 동기가 인간이 원치 않게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부정적인 경험 때문인데 그런 인간의 삶의 측면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느 예전 시인이 "혁명은 끝났고 방만 바뀌었다"라고 말했듯이 또 다른 중독 행위에 사로잡힐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도움 될지도 몰라서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자기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타인의 마음으로 상상해 보면 좀 더 현실적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욕구를 조금 떨어져 살펴볼 때 그 욕구가 비현실적 인지 아닌지를 좀 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인데  이때 자신을 그저 한낱 인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고 그래서 한낱 인간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그 중독 행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조금 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끔은 실패도 하고 실수도 할까 봐 걱정이 들거나 두려움마저 느낄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오늘 저녁에는 삼겹살을 구워 먹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구 함께 느끼는 하나도 극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한낱 인간으로서 말이지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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