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심리학 (2): 오이디푸스 신화
오이디푸스 신화는 프로이트에 의해 재조명을 받으며 새롭게 해석된 신화 속 이야기입니다. 우선 짧게 그 이야기를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오이디푸스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인 라이오스와 어머니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낳은 아이에 의해 아버지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이 내려집니다. 오이디푸스가 태어나자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는 신탁이 현실로 이루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어린 오이디푸스의 발목을 묶어 부하를 시켜 인적 없는 산에 버리도록 명령하였지만 그 일을 맡은 부하는 차마 어린 오이디푸스를 버리고 오지 못하고, 이웃 나라 코린토스의 목동에게 아이를 넘겨주게 됩니다. 어린 오이디푸스를 받은 목동은 그 아이를 코린토스의 왕인 폴뤼보스와 그의 아내 메로페에게 바칩니다. 오이디푸스는 폴뤼보스와 메로페를 친부와 친모로 여기고 자라던 중 장차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는 그 무시무시한 운명을 피하기 위하여 코린토스를 떠납니다. 오이디푸스는 테바이로 여행하던 중에 자신의 친아버지 라이오스와 길거리에서 통행에 분쟁이 붙어 라이오스를 죽여 버리고 맙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그는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합니다. 오이디푸스는 테바이를 선정으로 잘 통치하였으나, 갑자기 테바이에 역병이 돌게 됩니다. 오이디푸스는 이 역병의 이유를 알기 위해 크레온을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으로 보내어 역병의 원인을 알아 오게 합니다. 신탁은 “선왕인 라이오스 왕을 죽인 자를 찾아서 복수를 하면 역병이 물러간다.”라고 하였고 일전에 자신이 길거리에서 죽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맹세하는데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찾기 위해 크레온이 데려온 그리스 최고의 예언가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가 찾고 있는 살해자가 바로 그 자신임을 말해 주게 됩니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친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살해하였고 지금껏 아내라고 알고 있었던 이오카스테는 사실 자신의 어머니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오카스테는 이 무서운 진실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를 빼어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소경이 되고 맙니다."
이 신화 속 이야기를 프로이트는 남자아이가 엄마에 대한 성욕의 경쟁자인 아버지를 살해하고 엄마를 독차지하려는 은밀한 욕망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 신화 속 이야기는 자신의 엄마를 차지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내가 사실은 자기 엄마였다는 사실을 알고서 두 눈을 찔러 소경이 되는 것으로 일단락되는데 이는 무엇을 비유하는 상징일까요? 그리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지 못하고서 다투다가 결국 죽이게 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제 나름대로의 설명을 드리기 전에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비유란 삶의 특정한 측면을 에둘러 가리키기 때문에 실제 삶의 자연스러운 연속성과는 제대로 일치할 수 없고 마치 특정 장면들을 연속적으로 찍은 사진의 모음과 같기 때문에 특정한 장면들의 연관성만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두 질문에 대한 제 설명을 드리자면 아버지를 살해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다툼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춘기 초기가 되면 자기에 대한 의식이 한층 발달하게 되고 그에 따라서 자기주장도 강해집니다. 신화 속에서 다툼이 일어난 이유는 좁은 길목에서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가 마주치는데 누가 비킬지가 다툼의 원인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부가 왕의 행차이니 비키라고 시비를 걸었다고도 하는데, "내가 먼저 내려가고 있었으니 당신이 비켜달라"라고 하는 오이디푸스를 보고 무엄하다며 싸움이 납니다. 오이디푸스가 밀쳐내고 지나가려 하자 라이오스 왕이 화가 나서 말을 다루는 채찍으로 그를 때렸고 결국 싸움이 나서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과 일행들을 그들이 누군지도 모른 채 죽여버립니다. 이를 사춘기 초기의 경험에 대입해 보면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명령이나 도덕 기준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어서 그에 대한 반항심, 달리 말해서 자신의 느낌과 감정과 욕구에 기반한 자기 생각, 그리고 그로부터 유래되는 윤리적 자기주장을 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라캉의 개념인 대타자(외부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인물이나 제도)와 소타자(내면화된 타자의 운리)를 대입해 보면 우선 독립에 대한 선천적인 욕구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이제껏 대타자일 뿐 아니라 일부분 소타자, 즉 내면의 윤리적 기준으로 작용했던 아버지의 명령과 도덕관념이 어쩐지 이상하거나 불편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안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한 윤리적 관념, 즉 왜 그래야 하는지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의혹 때문에 아버지의 명령이나 도덕관념을 낯선 타자의 것으로 느끼게 되고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서 추방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명령이나 도덕관념에 의혹이 생겼다고 자동적으로 자신의 윤리체계가 완벽해질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설사 아버지의 도덕적 명령이나 관념을 자신 안에서 죽였더라도, 즉 폐기했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불안해질 수 있고 그래서 어떤 기준을 찾으려고 할 수 있는데 반드시 인과론적으로 발생하는 일은 아니지만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하고 돌보는 엄마의 기준을 따르러는 성향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도덕적 관념은 강압적인 명령조의 성질이 아니라 몸에 칭징 감긴 쇠사슬 같이 은근하지만 좀처럼 풀려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엄마의 도덕적 명령에 반한다면 엄마의 돌봄과 보호, 즉 자신에 대한 엄마의 애졍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윤리의 목적은 삶의 방향이나 갈피를 잡는 기초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강압적인 명령조의 도덕 관념을 자기 안에서 폐기하게 되면 그 결과로 삶의 갈피를 잡기 힘들게 되고 이는 자신의 심리적 안전을 위협하게 되는데 이때 아이는 자신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의 보호를 갈구할 수 있고 그 대상은 이제껏 자기를 돌보고 보호했던 엄마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도덕 꽌념을 내면화, 즉 라캉의 개념을 빌리면 엄마의 윤리적 내용을 내면화를 통해 소타자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타자의 도덕적 명령은 자신의 감각과 느낌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생각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에, 다시 말해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좌절도 하다가 다시 살펴보는 자신의 이런저런 굴곡진 삶의 과정적 측면들로부터 동떨어져 있고 게다가 그 목적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실존적 고민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막연히 심리적 안정감만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자신의 윤리체계로 편입되기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이의 마음속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생생한 불만스러음과 함께 엄마에 대한 적대감이 자랄 수 있고 그로 인해 심한 불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