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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Jun 06. 2022

그리스 로마 속 심리학(3) 헤파이토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절름발이인 헤파이토스라는 신도 등장합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여럿이지만 저는 그가 절름발이였다는 사실과 그가 대장장이로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만들었다는 사실에만 주목하겠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이성(Vernunft)과 오성(Verstand)을 구분하는데 철학에서 오성은 "도구적 이성"이라고도 불립니다. Verstand(오성) 영어로 옮기면 "undetstanding"으로서  독일어나 영어 표현 모두 "이해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사는 항상 어떤 특정 대상이나 현상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대상이나 현상은 우선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름부터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상상이나 공상 속에서만 "존재"하는지와 함께 그 상상이나 공상이 현실로 옮겨질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럴 수 없다는 판단이 필요하고 이런 판단은 이해에 앞서서 내려져야만 그 대상이나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런 존재적인 판단은 오성이 아닌 이성이 담당합니다. 또한 그와 함께 가능하다 및 불가능하다는 범주적 판단도 이성이 담당하게 되는데 이때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것을 가능하다고 우기면 아성은 그 억지에 눌려서 제 기능을 다할 수 없게 되고 흔한 표현으로 이성이 흐려지면 이 영향을 받아서 오성도 도구적 이해의 능력이 줄어들거나 막히게 될 수 있습니다. 이를 헤파가 토스 신화애 대입해 보자면 제 눈에는 이성의 지도(판단)가 없는 오성은 헤파가 토스처럼 불구인 셈입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인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철학자입니다. 이때 일차원적이란 윤리적 가름 없이 이윤만을 생각하면서 재산을 축적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하는데 이는 비단 현대인의 모습만이 아니라 재산 축적의 가능성을 가졌던 군주 영주 또는 귀족계급과 상인계급에도 해당되는 표현일 것입니다. 오래전 표현이 되어버린 말 중에 "돈에 눈이 먼 사람"이라는 표현에 있는데 이때 "눈이 멀다"는 표현 중에 "눈"은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이성의 윤리적 판단력"을 가리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돈에 눈이 멀려면 이성의 한 기능인 양심의 가책을 피해야 하는데 이때 쓰는 방법이 합리화를 통한 들러대기 식 방법으로서 요즘 표현로는 내로남불쯤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방법을 불문하고서 이윤만을 추구하는 무리나 대세에 편승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보이면서 바보 취급을 하며 불편한 자기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려고도 합니다.


철학의 한 분파에서는 "합리적 이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표현에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합리적"이라는 표현입니다. 합리적이란 표현을 풀어 보면 "이치에 맞는다 또는 부합된다"는 뜻인데 이를 기준 삼아서 생각해 보면 과정으로서의 삶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느껴지는 감정과 욕구와 합리적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는데 이는 이해하는 능력인 오성의 기능을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즉 내가 왜 아런 감정이나 욕구를 느끼는지 이해하게 된다면 이성은 그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고 그에 따라 그 감정과 욕구의 표현이나 실현이 마땅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후기 근대라고 번역되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소위 합리적 이성에 반발해서 인간의 욕구나 감정을 전면에 내세우며 중요시합니다. 그런데 모더니즘의 합리성에 반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느낀다와 욕구한다(바란다)라는 심리적 기능은 생각이라는 기능. 즉 과정으로서의 생각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화가 난다 또는 억울하거나 속상한다라는 감정과  복수하고 싶다는 욕구는 반드시 그에 앞서는 기억(생각)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생각으로 인해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런데 후기 근대가 소위 합리적 이성을 거부하고 혐오하게까지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게다가 소위 합리적 이성을 마치 낯선 외부의 대상처럼 대상화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런데 소위 합리적 이성에 대해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끼도록 한 생각은 또 무엇일까요? 리고 삶의 방향을 더듬어서라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과연 감정과 욕구의 표현에 대한 합당함을 판단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 밖으로 내뱉다면(표현한다면) 마음이 항상 편하고 시원하기만 할까요? 그리고 그렇게 주변의 조건이나 남들을 고려하지 않고서 날 것 그대로 감정과 욕구를 표현한다면 이해하면서 그 이해를 바탕으로 표현 방법을 찾는 오성은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게 될까요? 끝으로 그렇게 날 것 그대로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밖으로 내뱉었을 때 찾아오기도 하는 죄책감이나 찝찝함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속으로 "다시는 그렇게 하기 싫어"라는 느낌과 함께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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