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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ar Jade Jan 24. 2020

엄마가 이럴 거면 전부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

가볍게 무거운 글 시리즈_가벼운 일상에서 적는 괜히 무거운 글 (2)


사건의 발단은 늘 그렇듯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됐다. 막내 동생의 ‘토요일 1시’ 발언이 그 시작이었다.

사람들이 종종 내게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나는 매번 답을 머뭇거린다.
가족의 재구성이 한차례 이루어진 우리 집은 엄마가 계시는 경주와 아빠가 계시는 양산으로 나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설명하기 어려울 때에는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비무장지대 ‘부산’을 답하기도 한다.

평소 이 간단한 질문에도 곤란해하는 나이기에, 명절의 시간을 배분하는 일은 더더욱 곱절의 고통을 수반할 때가 있다. 이번 설에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엄마는 미래지향적이며 애쓰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는 삶의 방식을 중요시하는 반면, 나의 아빠는 현실주의적이며 계획과 절차를 중요시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의 막내로 사업에 뛰어들었던 엄마와, 가족의 장남으로 회사 생활을 이어온 아빠였으니 심증과 물증 모두 두 분의 성향을 입증한 셈이다. 이처럼 완벽히 상반된 이 둘의 결혼 생활은 역시나 순탄치 않았고, 그런 모습을 보는 나와 내 동생들에게도 가족의 재구성은 슬픈 동시에 오히려 조금의 안도감을 쥐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엄마와 아빠의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이런 단단한 모습들이 이번 명절을 계기로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작은 아빠였다. 육십삼 년의 아버지의 시간 동안 단 한 차례도 빼먹은 적 없으셨던 제사를 올해 설날부터 없애기로 하셨다. 명절 때만 되면 하얀색 도포에 검정 유건을 쓰시고 ‘안동 권 씨’의 장남 본분을 성실히 이행하셨던 분이셨기에 이런 결정은 우리 가족들에게 적지 않은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교회를 다니는 내 여자 친구를 며느리로 일찌감치 점찍어 두신 아버지의 승부수가 아닌가라는 추측과 더불어 여러가지 소문들이 난무했다.
아무튼 아버지는 제사를 없애신 첫 설날에 조금 더 파격적인 행보로 서울을 올라오는 표를 덜컥 끊으셨다. 자식들 셋과 내 여자 친구가 내려오는 교통 값보다 홀로 1박 2일 다녀가시는 편이 아버지의 계산에는 합리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이번 설 연휴인 ‘금토일월’ 중에 ‘금토’는 아버지의 선점으로 조기 매진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일정이었다. 연휴 다음 날인 화요일, 수요일까지 시간 여유가 있는 우리와는 달리 인턴 업무로 월요일까지 밖에 쉴 수 없었던 막내동생이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막내 동생의 생각은 이랬다. 아빠와 토요일 점심까지 시간을 보낸 뒤 회사 일이 있다는 핑계로 ‘토요일 1시’에 경주로 향하는 계획이었다.

첫째 동생 역시 막내가 토요일 1시에 간다고 하니 ‘그럼 같이 가자’ 했다. 나는 동생들의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지만 엄마는 그렇게 우리 일정을 전달받으셨다.

졸지에 두 동생들은 ‘토요일 1시’에 경주를 내려가고, 나와 내 여자 친구는 여자 친구의 교회가 끝나는 ‘일요일 12시’에 내려가는 일정이 되어 버렸다.

저녁까지 먹고 내려갈 생각이셨던 우리의 아버지는 토요일 저녁 두 동생들을 잃으셨고,
토요일 밤과 일요일 명절 아침을 함께 맞을 생각이셨던 우리의 어머니는 장남과 그 여자 친구를 잃으셨다.




‘토요일 1시’.
엄마도 두 동생들이 1시에 내려온다고 하니 아빠가 일찍 집으로 돌아갈거라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졸지에 명절임에도 할 거 다 하고 늦게 내려오는 아들이 된 내가 저녁 내내 엄마를 괴롭혔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하나도 모른 채 나는 그날 밤 엄마와 전화 통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에서, 그동안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엄마의 외로움과 서운함이 뚝뚝 묻어 있었다. 한 번도 내게 ‘명절’을 강요하신 적이 없던 엄마는 통화 내내 유독 ‘명절’의 특수성을 강조하셨고, 어떤 일이든 애쓰지 말고 흐르는 대로 살기를 가르치셨던 엄마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애써 내려오지 않는 나를 다그치셨다.
강인하기만 했던 엄마는 어느새 엄마 속에 여린 소녀를 보듬고 계셨다. 그리고 그런 엄마 속 소녀와의 첫 대면에 나는 낯설어했다.

결국, 통화를 하며 모든 자초지종을 알게 된 엄마는 우리 모두가 있는 단톡 방에 선포를 하셨다.


이럴 거면 전부 내려오지 말라고.’


‘아빠’를 서울에 남겨두고 먼저 내려오는 건 아니라며 동생들에게도, ‘일요일’에 교회 갔다 내려오는 건 너무 늦다며 나에게도, 이번에는 내려오지 말라는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셨다.
새벽 늦게까지 우리들은 엄마의 카톡을 두고, 비상대책본부를 꾸리고 사태 진압에 나섰다. 아직 결론이 나오진 않았지만, 결국엔 우리들은 경주로 내려갈 예정이다. 그리고 경주에서 이 이야기의 엔딩 크래딧이 내려질 거라 믿는다.

시간이 흘러가며 우리는 때론 변해가는 아빠와 엄마를 마주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들도 변화해야 함을 직시했다.

제사를 없애기로 결정하고 서울로 올라오신 아빠의 모습에서, 그동안의 외로움과 서운함을 감추시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세어 나온 엄마의 귀여운 투정까지.

나는 그 변화를 외면할 수 없었고, 외면해서도 안됐다.


그 변화가 좋든 싫든 우리는,

변해가는 아빠, 엄마에 맞춰가야 할 의무가 있는 그분들의 사랑스러운 아들 딸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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