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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베개 Dec 06. 2019

수련의 소감

차 한 잔에 떠오른 위선과 오만

 마지막 저녁 예불을 마친 뒤 간단한 과일과 차를 차려 두고 자유롭게 모여 앉았다. 먼저 지도 법사는 수련회 지원자의 선발 기준에 대해 말해 주었다. 절반을 불교 신도 중에서 뽑고, 30%는 가톨릭을 비롯한 타종교를 신봉하는 사람, 20%는 종교가 없는 사람을 선발했다고 한다. 타종교를 믿는 사람을 30%나 뽑은 데에서 송광사의 열린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의 수련 경험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는 ‘차 한 잔을 나누며’라는 순서가 시작되었다. 호명된 사람은 앞으로 나가 자기를 소개하고 참가 동기와 수련 소감 등을 이야기했다. 함께 생활하면서 그 신상이 궁금했던 도반들도 많았는데 그 호기심을 풀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모두가 다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지도 법사가 선발했다.


 가장 먼저 호명된 분은 남녀 최고령자들이었다. 62살과 60살이었다. 나는 입재식 날 이번 기에 대학 총장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120명 중에서 대학 총장일 것 같은 도반을 찾는 버릇이 생겼다. 대학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 최고령자로 나선 분은 내가 대학 총장 1순위로 지목한 분이었다. 그분은 참 구수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경남 통영에서 왔는데 수련회에 참석하는 것이 너무나 절실했다. 술을 끊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기때문이었다. 하루에 소주 3병을 마시는 남편이 걱정된 그 아내가 통영 어느 절 주지 스님께 신신부탁하여 겨우 추천을 받아 냈다고 한다. 나의 관상은 완전 엉터리였다. 그는 수행 체험을 재미나게 이야기했다. 애초 수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술을 끊기 위해 왔기 때문에 아주 가뿐한 마음으로 참선을 했단다. 어느 순간 ‘성불사 깊은 밤에……’라는 가곡의 악상이 떠오르고 자기도 모르게 조용히 그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러자 머릿속에 둥근 달이 떠올라 환희심이 생겼다. 다음 날도 뭔가 될 것 같아 좀 더 열심히 수련했는데 더 이상 달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그게 욕심 때문이었을 거라고 그럴 듯하게 해석했다.


 여자 최고령자는 작년에 자원봉사자로 왔었고, 그때의 다짐대로 올해 수련생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공양 때마다 옆 사람에게 이리저리 손짓 눈짓을 하던 것이 기억났다. 작년의 경험을 이웃 도반을 위해 베풀어 준 것인데, 그 사연을 몰랐던 나는, ‘저분은 왜 저리도 간섭이 많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다음으로 호명되어 우리 앞에 선 분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동안 갖가지 소리를 내고 몸부림을 치며 나의 수행을 방해하던 내 앞의 도반이었다. 그가 부산에서 온 교사라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놀랐다. 이번에도 내 예상은 완전 빗나갔다. 그는 쌍둥이를 둔 50대 가장이었다. 교사인 아내도 함께 나왔는데, 그녀는 남편이 수행에 대한 성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단서를 달며 여기에 오게 된 것이 술 때문임을 실토했다. 1년 365일 내내 술을 마시기 때문에 송광사 수련회에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소기의 목표를 이룬 것이라고 했다. 송광사에 들어와 술 끊은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 스님의 말씀을 듣고 왜 저런 말씀을 하는가 의아했는데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런 사례가 많았고 또 소문도 났는가 보다. 그리고 나는 그 도반을 비로소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술과 담배가 끊어지자 심한 금단증세를 느껴 몸부림쳤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아주 귀한 분’을 소개하겠다며 두 분을 호명했다. 가톨릭의 수사님과 수녀님이었다. 수사님은 자정국사 사리탑 앞에서 불교계가 서울 등 대도시에도 포교원을 세우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다가 혼이 난 바로 그분이었다. 지도 법사는 그때 돈이 있는 당신들이 왜 포교원을 지어 주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무랐다. 알고 보니 참 엉뚱한 나무람이었다. 그 수사님은 혁신적 종교 수행을 하고 계신 분인 듯했다. 사찰 수련회에 참가한 것이 처음도 아니었고 불교 법회에도 여러 번 참석했다. 막노동을 하면서 노숙자들의 세계를 체험했고 수련회에 참석하기 직전까지 알코올 중독자들의 집단 거주지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의 말은 참신했고 감동적이었다. 그는 다양한 체험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체험에 대해 요약 진술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 뒤에서 수사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수녀님의 마음은 편하지 않은 듯했다. 같은 가톨릭 성직자로서 수사님과 어느 정도 균형은 잡아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수사가 그렇게 말을 잘하니 자기도 말을 잘해야 하겠고, 말의 수준이나 시간도 비슷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수녀님은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불우 노인들을 뒷바라지하는 수녀님은 말이 필요 없는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야기를 하였지만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내가 왜 오게 되었는가. 왜 다리를 다쳤는가. 깁스를 하게 되었는데 그 깁스를 어디서 했는가. 이런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서 수녀님은 산뜻하면서도 인상적으로 말을 끝맺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말의 아귀가 잘 맞지 않고 중언부언하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몸을 비트는 수련생도 있었다. 그래도 수녀님은 산뜻한 마무리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않았다. 나도 수녀님의 하느님께 수녀님의 멋진 마무리를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받아지지 않는 듯했다. 수녀님은 여전히 주절주절 이야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마침내 어떤 수련생이 세차게 박수를 쳤다. 여기저기 박수가 터졌다. 수녀님은 “아, 빨리 끝내라는 뜻이죠?” 하며 분위기를 정확하게 읽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지 않아 안간힘을 다쓰면서 꽤 긴 시간을 끌었다.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말하기를 요구하고, 할 말이 많지 않을 때 말을 길게 해야 할 상황을 만드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얼마나 큰 짐이 되는지 절감했다. 말을 끝내지 못하는 수녀님을 보고 나는 내내 가슴을 졸였다.


 이어서 미국 유학 중 잠시 귀국한 여학생과 깡패에게 엄청나게 얻어맞고 자기가 지은 업보를 없앴다는 젊은 여대생도 나왔다. 의정부서 왔다는 주부는 15년 만의 휴가를 얻었다고 했다. 그녀는 수련회 참가자 명단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새벽에 출발해 종무소 앞에 주저앉아 시위를 해서 마침내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5일 동안 집을 비울 수 있게 해준 남편에게 감사한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우리나라 남자들이 아내를 감동시키기에 참으로 유리한 여건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동안 집안일을 해 줌으로써 저렇게 아내를 감동하게 만들 수 있다니. 그 도반에게 나는, “저는 당신 남편이 5일 동안 하고 계신 일을 11년 동안 해 왔습니다”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도반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시종 제발 지도 법사가 나를 호명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묵언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내가 저 앞으로 나가서 그간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순간 공든 탑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반대의 상념이 생겨났다. ‘아니, 나를 지명하는 시늉만이라도 내야 하지 않나?’ ‘저렇게 말의 앞뒤가 맞지 않고 더듬거리는 도반들도 지명하는데 왜 국문학자인 나를 내버려두지?’ ‘이번 송광사 수련회가 좀 더 그럴듯한 내 말로 정리되면 좋을 텐데.’ 이런 생각이 일고 있었다.


 그래, 나를 무시할 리는 없겠지. 오줌이 마려워도 참고 자리를 지켰다. 다음이 꼭 내 차례일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의무 방어전처럼 한마디를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흘러도 나는 지명되지 않았다. 나는 끝내 지명되지 않을 수도 있을것 같았다. 내 차례가 곧 올 것 같은 예감과 제발 나를 지명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은, 내 차례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한 섭섭함으로 변해 갔다. 아니, 애초 ‘내가 지명되지 말았으면’ 했던 바람은 그 반대 바람의 위장인 것 같기도 했다.


 교수로서 행세한 날들이 떠올랐다. 나는 그동안 어떤 자리에 참석하든, 사람들에 의해 윗자리로 떠받들어졌다. 사람들은 교수 신분인 내가 ‘인격자’이고 ‘말을 잘하기에’ 나서서 한마디 해 주기를 요청했다. 학생이나 제자가 모인 자리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나는 어느새 그런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말하기를 수줍어하고 말하기에 서툴렀던 시골 소년은 박학한 달변가로, 세상일에 통달한 인격자로 행세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런 대접이 어색했지만 어느새 나는 어느 자리에서든 그런 역할을 내가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몰라도 아는 체, 틀려도 틀리지 않은 체하는 것이야말로 달변가의 전제였다. 머리와 가슴이 입과 혀를 진지하게 통제해야만 말을 삼갈 수 있는데, 어느새 입과 혀가 독립하여 스스로 매끄럽게 말을 조작해 내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지도 법사는 교수의 그런 폐단을 꿰뚫어 본 것인가? 온갖 종류의 말잔치에서 설치던 나에게 자신을 반성할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인가? 그 하는 일들 때문에 말을 잘하지 못하는 도반들은 두루 지명했지만, 말에 관한 한 최고의 수준에 있다 할 교수의 자리에 있는 나를 지명하지 않는 데는 분명 깊은 뜻이 들어 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그날 나는 송광사 맑은 물로 끓인 차 한 잔을 마시며 묵언 속에도 남아 있던 타성과 오만, 위선의 찌꺼기를 씻어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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