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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베개 Nov 21. 2019

묵언 수행을 하며 알게된 것

아는 자는 말하지 아니하고

부산에서 순천으로 가는 길은 한적했다. 그 길은 고향 땅에서 고향의 강을 건너 저쪽 세상으로 나를 나아가게 하는 길이었다. 고향의 강을 건너니 옛 생각이 났다. 그 길로 나는 ‘출가’한 적이 있다. 서른 살을 앞두고 군 입대를 하기 위해 그 길을 달렸다. 그 길은 마산에서 끝났다. 마산 장정이 된 나는 마산역 앞에서 머리를 깎고 논산훈련소행 열차에 올랐다. 차창 밖에서 아버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이생에서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아버지는 내가 신병 훈련을 받고 있을 때 이 세상을 하직했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을 못 한 죄인이 되었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운명을 예감하지 못하고 다만 내 청춘의 마지막 날들이 그렇게 흘러간다는 막막함만을 느꼈다. 그 막막함은 지난 봄 쌍계사 벚꽃 구경을 하고 난 뒤 이 길로 달려올 무렵의 느낌과 다르지 않았다. 사람이나 꽃이나 그 절정에 이르러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갖는 느낌이란 막막함이 아닐까. 송광사로 가는 이번 길이 그런 느낌을 떠올리게 했지만 곧 그것을 떨쳐 내게 하는 힘을 느꼈다. 시작하기도 전에 느끼는 뿌듯함은 송광사가 멀리까지 발휘하는 위력일 테다.


 절로 향하는 전나무 숲길에 들어서니 ‘참 나를 찾아서, 출가 4박 5일’, ‘밖에서 찾지 말라’는 플래카드가 나를 맞이했다. 수련복과 고무신을 받아 숙소인 대지전으로 갔다. 방에는 가방 하나만이 놓여 있었다. 방바닥이 뜨끈뜨끈했다. 앉아 보니 등에서 땀이 났다. 뒷산 참나무 숲에서 불어온 바람이 땀을 식혀 주었다. 대웅보전과 승보전, 관음전에 들러 삼배를 올리고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관광객들이 수련복 입은 나를 힐금힐금 바라보았다.


 수련 장소인 사자루는 계곡에 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어떤 힘이나 권위에도 굴하지 않는 숲속의 왕, 사자의 새끼들을 기르는 곳이라 하여 사자루라 부른다고 했다. 계곡을 베개 삼아 누워있다고 침계루(枕溪樓)라 부르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시냇물 소리가 더 우렁차게 들렸다.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었다. 지도 법사 스님의 목소리와 외모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전생이 스리랑카 스님이라는 농담이 실감나게 들릴 정도로 그을린 얼굴은 비장함과 엄격함을 보였다. 묵언(黙言)의 청규(淸規)가 내려졌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깊은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참 나를 아는 것이 최상의 일이다. 지금까지 입으로 지은

 죄를 참회하는 뜻에서 나는 묵언하겠습니다.


 우리는 열 번 이상 따라 외쳤다. 묵언은 참 특이한 경험을 하게 했다. 먼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하는지 절실히 느끼게 했다. 눈짓이나 손짓도 의사소통의 수단은 될 수 있지만 그 한계가 분명했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온 수련생들은 평소 수준에 가깝게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손짓을 요란하게 하거나 허공에 글을 쓰며 애를 썼다. 지도 법사는 “당신들이 농아야?” 하며 그런 짓도 못 하게 했다.


 우리 시대의 말이 타락한 풍경을 떠올렸다. 말이란 대상을 정확하게 지칭하거나 진실한 의미를 담아야 할 텐데 우리의 말이 그런 전제를 무너뜨리기만 한 것 같았다. 말을 통해 사람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살 만한 세상을 이루는 바탕이 될 텐데, 말이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자기를 그럴 듯하게 위장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사례가 더 많지 않은가? 이런 생각들이 묵언 중에 자꾸만 떠올랐다.


묵언은 말로 생계를 꾸려 온 나 자신의 과거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하여 끊임없이 말을 해 왔다. 그중 참 많은 부분은 남을 헐뜯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남의 기를 죽이는 것이었다. 나는 말을 너무 많이 하며 큰 죄를 지었다. 구업(口業)을 생각하니 참담해졌다. 나는 참회하며 완벽하게 묵언했다.


하루 내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지내니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졌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너는 참 말이 없는 아이구나”라는 말씀을 어른들로부터 듣곤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정말 유년 시절의 나는 풀밭으로 들어가 아이들 떠드는 소리를 멀리 들으며 가만히 있고는 했다. 그런 내가 어쩔 수 없이 온갖 말을 다 해야 했으니, 사실 나는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언어생활을 해왔던 것 같기도 했다.


 교수로서 강의실에 들어가면 강의 시간 동안 나는 쉴 새 없이 말을 해야 했다. 내가 말을 하기 싫다고 하여 침묵하면 강의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을 하기 싫을 때, 말을 할 능력이 부족할 때, 그리고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을 때도 나는 말을 해야 했다. 강의실 밖에서도 남들은 내가 교수라는 이유로 더 많은 말을 먼저 해 주기를 요구했다. 나는 그래서 참 실없는 말을 많이 했다. 


 불필요한 말, 적당하지 않은 말, 자신 없는 말들을 하여 학생과 이웃을 괴롭히고 속였다. 세상 사람의 말의 타락을 비난하기 전에 말에 의해 헝클어진 나를 추슬러야 했다. 앞으로 말을 안 할 수는 없겠지만, 꼭 필요한 말을 더 잘하기 위해서라도 침묵이나 머뭇거림의 미덕을 배울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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