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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베개 Nov 21. 2019

여름 휴가를 템플스테이로 선택한 이유

유년의 기억에서 시작된 출가의 길

어머니의 죽음은 내 유년의 화두였다. 온갖 힘든 일들에 육신을 혹사하고 생활고를 혼자 감당해야 했던 어머니는 나의 귀의처였지만 곧 멀어질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없는 이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유년의 나에게 절망감을 일으켰다. 내 중학교 시절 어머니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잠시 넘었다 돌아왔다. 나는 그 뒤로 삶의 고통과 죽음의 허망함에 대한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여름이면 고향의 강에 홍수가 났다. 홍수는 강가의 벼, 배추, 수박, 갈대조차 휩쓸어 갔고, 상류 지역의 온갖 생활 쓰레기들을 실어와서는 내려놓았다. 나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물에 퉁퉁 부은 시신을 보았다. 통곡하는 유가족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슬픈 장면은 홍수에서 비롯했던 배고픔의 감각과 함께 내 유년의 기억으로 아직 생생하다.


 고등학교 시절 인적 끊긴 묘지로 가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던 기억도 남아 있다. 그 염세적 구절들이 아련하다. 화장터 주위를 맴돌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굴뚝의 연기를 바라보고 한숨지었다.


 군사정권은 대학 캠퍼스에까지 죽음의 그림자를 더 짙게 했다. 나는 그 치열한 죽음 앞에서도 유년에서 시작된 운명적 죽음의 흔적을 발견하곤 했다.


 군대 시절 전우의 죽음은 망상을 더욱 부추겼다. 그는 경계근무 중 옆 병사의 오발로 사망했다. 죽은 전우의 그 자리는 원래 내 자리였다. 나에게 급한 일이 생겨 근무 시간을 그와 바꾸었던 것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의 소중한 목숨을 희생시킨 것 같아 망연자실했다. 망상은 날이 갈수록 확장되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른 생명의 희생을 전제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항상 떠올렸다.


 타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나의 죽음에 대한 공포로 변했다. 내 몸에 생기는 병적 증상에 대해서 최악의 자체 진단을 내리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몇 년에 한 번씩은 말기 암 환자가 됐다. 그리고 고통의 극에 이르렀을 때 병원의 정밀 진찰을 받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부처님으로 하여금 출가를 결행하게 한 네 가지 고통 중 가장 궁극적인 고통을 겪으며 가끔 출가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조건은 내가 출가를 실행할 수 없게 했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얻었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유학을 떠난 아이 엄마를 대신해 아이를 키웠다. 소생하는 새 생명의 모습은 위대한 경이였다. 육아의 길은 고단했지만 내 혼은 가없는 열락을 경험했다. 그럴수록 가슴의 한 모서리에서 죽음의 상념이 더욱 강렬해졌다. 생육을 시작하는 새 생명 옆에서 나는 노회한 죽음의 신과 사투를 벌였다.


 나에게는 단짝 중학교 친구가 있다. 의사가 된 친구는 목사의 아들이다. 나는 그 친구에게서 예수님을 보는 것 같았다. 순수하고 헌신적인 기독교인이다. 그와 나는 어떤 인연인지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듯하고 헤어진 듯하다가도 다시 만난다. 친구가 남몰래 미국으로 훌쩍 떠나 버렸을 때 그를 이생에서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 뒤 나는 방문교수로 미국에서 살게 되었다. 뉴욕 맨해튼 43번가 한국인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기적과 같이 다시 만났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다가 미국 동부 관광단에 끼어 뉴욕 구경을 왔던 것이다. 기독교인 친구와의 만남은 인연이란 게 얼마나 질긴 것인가 확인하게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우리는 대구에서 다시 만났다. 팔공산 동화사 대불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친구는 물었다.


 “너는 학생들에게 인생의 목표가 뭐라고 가르치나?”


 친구가 던진 그 말이 그날따라 생생히 꽂혔다. 나는 이렇게 얼버무렸다.


 “교수는 자기가 갖고 있는 어떤 진리나 신념을 학생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지. 다만 어떤 것이 진리가 아니고 진실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해 줄 수는 있겠지.”


 부끄러웠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확신이나 진실도 학생에게 당당하게 제시할 수 없는 교수인 나는 당당한가? 나 스스로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렇게 살다 공포에 떨면서 죽어 가는 것인가? 마흔 고개를 넘어서면서도 여전히 회의하고 의심하기만 할 뿐 어떤 소신도 갖지 못한 자의 초라함과 황량함. 그것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전반에 걸쳤던 대학 시절과 신출내기 지식인으로서 뛰어다닌 시절의 격동과 좌절의 체험에 닿아 있었다. 진실과 도리가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직시하며 그 부당성을 극복하고자 나는 나름대로 몸부림쳤다. 그때 나의 내면은 좀 더 과감하게 나아가라 명령했다. 타자들도 빨리 판단하여 결단하라, 확실하게 파괴하라고 나에게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 대부분의 몸부림은 결국 좌절로 귀결됐다.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함께 진보적 대열이 흩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군의 지식인과 정치인이 고개를 들고 나섰다. 날이 갈수록 우리의 현실은 암담한 진흙탕으로 변해 갔다. 사실 판단에서조차 사회 구성원 사이에서 상반되기까지 한 이 지경은 그래도 진리나 정의를 소중한 덕목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절망적인 것이었다. 진실로부터 동떨어진 말, 자기 양심과 괴리된 말이 세상을 뒤덮었다. 이렇게 말이 타락해도 좋은가?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은 계속해야겠지만, 자기를 정확하게 알고 자기 속에 들끓고 있는 욕심과 분함의 소용돌이를 잠재우지 않는 한 그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 되기 십상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그대로 나의 모습을 살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을 갖게 되었다.


 해마다 6월이면 전국 주요 사찰들이 여름 수련회에 참가할 사람을 모집했다. 어느 때부터 그 소식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출가’란 말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아이는 출가하려는 나의 발목을 꼭 붙잡아 두고 있었다. 아내의 유학 공부가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내는 11년의 유학 끝에 박사가 되어 돌아온다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한정 출가를 허락받았다. 아내는 나에게 11년 만의 휴가를 약속해 주었다.


 송광사 수련회 합격 통보를 받고 환호했다. 4대 1의 높은 경쟁률은 내가 겪어 온 시험들 중에서 그리 높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 합격 통보는 그 어떤 합격 소식보다 더 나를 기쁘게 했다.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 나갔다. 참선이 가장 걱정됐다. 오랜 시간 앉아 있어야 하니 치질이 문제를 일으킬 것 같았다. 출발 전 이런저런 일을 마무리하느라 무리를 한 탓인지 출발 이틀 전 하혈을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집안사람들이 아내의 박사 학위 취득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한다기에 고향 집으로 내려갔다가 그다음 날 고향 집 문을 나섰다. 아내는, “아이가 있으니 돌아오지 않을 걱정은 안 하지만” 하며 배웅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아들 하나를 두고 출가하셨고 성철 스님도 출가하실 때 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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