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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베개 Nov 25. 2019

현봉 스님의 '반야심경' 해석

일 년에 한 번 불을 끄는 용광로

『반야심경』에 대해 법문을 해 주신 현봉 스님은 보조국사 지눌의 원불(願佛: 자신이 일생 동안 섬기는 불상)인 ‘목조삼존불감’의 보수 과정이 화제가 되었을 적에 텔레비전 뉴스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사찰 불사가 대형화되는 추세와는 대조적으로, 접으면 7센티밖에 되지 않는 불감의 보수를 위해 방사선 투사기까지 동원하는 송광사의 정성이 많은 이를 감동시켰다. 스님은 1991년, 사십 대의 수행승으로서 도법․지환․명진․수경 등 10여 명의 소장․중진 스님과 함께 청정 불교 결사 운동인 선우도량을 만들기도 했다.


 현봉 스님은 공간과 시간을 인식하는 우리의 한계를 지적했다. 우리는 입방체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 입방체 속에는 다른 공간을 무수히 넣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곳에도 온갖 공간, 온갖 소리, 온갖 파장들이 공존한다. 천당과 지옥, 아수라까지 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부만 지각하며 그런 불완전한 지각 능력에 의해 지각되는 것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우리의 한계는 업(業)에서 초래한 것이다. 이 업을 떨쳐 없애야만 모든 것을 두루 듣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업을 닦아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온갖 것을 다 보고 듣는 것이 궁극의 목표는 아니다. 지금 이곳에 온갖 물건이 다 들어갈 수 있고 또 온갖 소리가 다 들리는 것은 인식 주체가 착각이나 환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존재한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실제로는 있는 것이 아님을 깨우쳐 안 분이 부처님이다. 우리에게 포착된 것만 보고 듣다가, 이곳에 공존하는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가, 마침내는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공(空)도 설명됐다. 공은 텅 빈 것이지만 끊임없이 생성하고 팽창하고 소멸해 간다. 공의 한자를 파자하면 ‘구멍 혈(穴)’과 ‘만들 공(工)’이 되니, 구멍은 텅 비어 있지만 그 구멍에서 모든 것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은 ‘텅 비어 있다’는 뜻과 ‘텅 빈 구멍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상반된 의미를 함께 가진 개념이다. 공은 생겨나고 소멸하는 모든 것의 원리다.


 깨달은 눈으로 보면 온 세상은 공이다. 세상의 본질을 공으로 통찰할 수 있을 때 궁극의 해탈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현봉스님은 『반야심경』의 핵심이 다음 구절이라고 설명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오온(五蘊)이 다 공(空)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느니라.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이때 오온이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라는 다섯 영역이 각각 쌓여 있는 것이다. 색온(色蘊)이 물질 일반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등 객관 대상을 통틀어 지칭하는 것이라면, 수온(受蘊)은 객관 대상을 지각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이고, 상온(想蘊)은 받아들인 것을 추상화하고 개념화하는 것이며, 행온(行蘊)은 그 마음이 일정한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며, 식온(識蘊)은 사물을 식별하는 마음의 본체로서 즉 육식(六識)을 지칭한다.


 오온이 공임을 깨달을 때 일체의 고액(苦厄)으로부터 벗어난다. 일체의 고액 속에는 현재의 고통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고통도 포함되고, 나의 고통뿐만 아니라 중생의 고통도 포함된다. 즐거움도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게 만든다는 점에서 고통이다. 또한 즐거움은 고통과 상대적으로 구분되는 불안전하고 불완전한 것이기에 근본적으로는 고통과 다르지 않다.


 포항제철 용광로의 불은 일 년에 한 번씩 꺼야 한다고 했다. 섭씨 600도에서 서식하는 자생 단백질을 없애기 위해서다. 사람에게 섭씨 600도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환경이지만 그 단백질에게는 아주 쾌적한 환경이다. 용광로 불이 꺼졌을 때의 온도는 사람에게 쾌적하지만 그 단백질에게는 자생이 불가능한 가공할 추위인 것이다.


 같은 상황이 어떤 존재에게는 고통이고 어떤 존재에게는 쾌적함이라는 것. 같은 상황이 어떤 존재에게는 죽음을 초래하고 어떤 존재에게는 삶을 보장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현실에서 엄연히 경험하는 것일진대, 고통과 즐거움, 죽음과 삶의 분별은 불완전한 지각과 인식에 의해 이루어진 허구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지각과 인식의 불완전함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같은 상황이 일으키는 분별되지 않은 느낌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을까? 그 느낌이 고통도 즐거움도, 죽음도 삶도 아닌 어떤 것과 관련된 것이라면, 도대체 그것은 우리에 의해 포착될 수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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