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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베개 Nov 25. 2019

관세음보살의 눈과 손은 왜 천 개나 될까?

천 개의 눈으로 돌아보라

국문학자 행세를 하며 살아온 세월은 나를 중진의 자리에 올려 놓았지만, 나의 삶과 멀어져 가는 학문적 글쓰기는 언제부턴가 나를 쓸쓸하게 했다. 논문도 학자가 삶에서 터득한 지혜를 담아야 하며, 논문이 일상적 삶의 길잡이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그 무렵 공(空)을 주제로 한다는 『구운몽』을 다시 읽었다. 광산 김씨 명문가 출신 유가(儒家) 사대부 김만중 선생이 불교적 주제를 담은 『구운몽』을 지은 것은, 그가 생애의 마지막 고개에서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시 읽어 보니 『구운몽』에는 죽음을 앞둔 사대부가 세속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분명하게 들어 있었다.


 『반야심경』의 공에 대한 현봉 스님의 강의를 듣는 자리에서 『구운몽』과 관련된 나의 학문을 떠올린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내가 국문학자가 된 뒤 처음으로 내 인생의 고민을 끌어안고 쓴 것이 『구운몽』 관련 논문이었다.


 『구운몽』에서 육관대사의 수제자인 성진은 우연히 여덟 명의 선녀를 만나 세속의 부귀영달과 욕망을 떠올리며 부러워한다. 그 순간 세속 인물인 양소유로 환생하여 최고의 행복을 누린다. 그러나 결국 다시 성진으로 돌아온다. 성진이 양소유로 태어나고 다시 성진으로 돌아오는 환생의 각 단계는 바로 앞 단계의 부정이다. 양소유가 처음의 성진을 부정했다면, 그 양소유를 부정한 성진은 처음의 성진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환생의 파란만장한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육관대사는 깨어난 성진이 양소유를 부정하자 칭찬은커녕 엄혹하게 꾸짖는다. 육관대사는 양소유의 세계를 한갓 꿈이라고 부정하는 성진의 태도를 특히 호되게 나무란다. 양소유에 의해 추구되었던 현실적 삶을 허망한 것이라 부정한 것이 성진의 결산이었다면, 그런 성진이 잘못되었다고 꾸짖어 줌으로써 성진을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게 한 분이 육관대사인 것이다.


 나는 육관대사의 이런 태도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이른 김만중 선생의 시선을 읽었다. 양소유의 삶으로 대변된 현실적 삶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는 시선이었다. 김만중은 사후 세계보다는 현실 세계에 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유가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자기 일생이 허망하지 않음을 확인하려 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김만중 선생을 위해 현생의 의의를 좀 더 분명하게 찾아 주고 싶었다. 『반야심경』의 공 사상에 대한 설법을 들으면서, 현생에서의 세속 삶은 사람에게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바라밀(열반의 피안으로 가게 하는 최고의 덕목 혹은 수행)을 실천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세속의 삶은 바라밀의 실천을 통해서 사람이 스스로 달라지고 마침내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해 준다는 점에서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현실인 차안과 극락인 피안을 대립시킨다. 그 사이에 가로놓인 깊고 넓은 강이 미망의 강이다. 그 강을 건너가기는 무척 어려워 뗏목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 뗏목이 부처님의 가르침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나는 이생의 찰나적 경험 속에도 미망의 강이 흐르고 있으며 아울러 피안으로 가기 위한 뗏목도 놓여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곳 현실의 경험에 충실함으로써, 그 경험을 피안으로 가는 뗏목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 충실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아(無我)와 공을 체득하게 하여 불법의 진리를 깨닫게 할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지금 이곳이 극락이고 지금 이곳의 나 자신이 부처라는 진실을 통각(統覺)하게 할 것이다. 그걸 알음알이가 아닌 삶 자체로 실천하여 언행일치를 보이는 것이 곧 깨달음일 것이다.


 내가 『구운몽』을 읽으며 새롭게 놀란 것은 성진에서 양소유로, 양소유에서 다시 성진으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이 한순간의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점이었다. 연화도량의 성진이 스스로 쓸쓸하다 하여 부귀영달을 생각하는 순간 양소유로 태어났고, 사대부로 태어나 온갖 부귀영달을 누린 뒤 그게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며 영원한 해방을 얻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양소유는 성진으로 다시 돌아온다.


“관세음보살의 눈과 손은 왜 천 개나 될까?”


 『구운몽』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스님의 이 말씀이 너무나 크게 들려 정신을 차렸다. 공 사상에 의해 세상의 본질을 깨달은 분이 관세음보살인데, 그분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거기에 무슨 상징이 들어 있을까.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은 그 천 개의 눈으로 고난에 처한 중생을 빠뜨리지 않고 다 보아 주시고, 어떤 중생의 상처도 그 천 개의 손으로 다 어루만져 준다는 뜻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관세음보살의 천 개 눈과 손은 바로 우리 자신의 눈과 손, 그것도 하루 동안에도 달라지는 우리의 눈과 손이라고 설명했다. 우리의 눈은 사랑의 눈이 되었다가 분노의 눈이 되고 저주의 눈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손은 자비의 손으로 남을 따뜻하게 해 주다가도 폭력의 손이 되어 남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우리의 마음과 몸은 이렇게 매 순간 쉴 새 없이 달라진다. 관세음보살은 탐진치(貪瞋痴: 욕심·노여움·어리석음)에 얽혀 시시각각 달라지는 중생과 같은 모습으로 나투시어 중생을 위로하고 구원한다. 위로와 구원을 받아야 할 중생을 그와는 다른 입장에서 동정하거나 아득한 윗자리에서 내려다보며 이끄는 것이 아니라 중생과 똑같이 됨으로써 중생을 위로하고 구원한다는 깊은 뜻을 관세음보살 상은 구현하고 있었다.


 관세음보살의 이런 자비행은 지장보살의 완전한 보살 정신으로 나아간 것 같았다. 온갖 세상의 중생이 빠짐없이 모두 극락으로 천도되지 못하면 자기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서언은 자기희생과 겸양과 자비의 극치를 보여 준다.


 송광사 대웅보전에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모셔져 있다. 연등불과 석가불과 미륵불을 지칭하는 삼세제불은 시간적 차원에서 부처의 총체인 셈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수없이 절을 했다. 그런데 지장보살의 서원은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되게 해 주었고 또 되게 해 줄 것이다. 그래서 삼세제불이 바로 일체 중생임을 깨닫는다. 삼세제불을 향해 절을 한다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절하는 것임이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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