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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야 Feb 22. 2022

울고 싶은 놈이 뺨따구를 맞았을 때.


 2022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고 좋은 일들을 기록해두고 싶은데 현실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서 마음이 아프다. 여전히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고민은 계속되고 있고 무언가 확실히 결정 나지 않은 상황인지라 4월 즈음해서 한국에 잠시 들어가 상황을 살펴보려는 계획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이 호주는 점점 제한사항들을 걷어들이고 경제회복에 주력하고 있다. 심지어 이제 금요일부터는 이곳 NSW 주 기준으로 대중교통과 의료시설 등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Mask 의무 착용 규제조차 해제된다. NSW 주민의 95% 정도가 2차 예방 접종까지 마친 상태이고 필수사항은 아니지만 권장사항으로 3차 접종을 계속 홍보하고 있는 와중에 어느새 50%의 수준에 이르고 심지어 5세 이상의 접종률도 거의 50%에 다다른 수준이라서 더 이상의 규제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실제로 바깥에 나가보면 간간히 Mask 착용한 사람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분위기는 아니고 반의 반토막이 났던 식당의 매출도 예년 수준의 8-90%를 회복했다. 여전히 일손이 부족한 상황은 이어지고 있지만 지난주 전면적으로 국경 개방을 선언한 이후 점차 호주로 입국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고 있어 이마저도 곧 해결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NSW Covid 최신 현황


 이에 반해 한국에 있는 아내의 소식을 들어보면 집 문 밖만 나서면 Mask는 필수이고 심지어 대중교통시설에서 전화통화까지 금기시된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전해 듣고는 너무나도 극명하게 차이나는 사회적 분위기에 선뜻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도 느리지만 규제가 점차 느슨해지는 분위기가 보이고 있어서 4월쯤에는 해외 입국자 자가격리도 해제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Life gose on"이라는 영어식 표현처럼 이 와중에도 삶은 계속되기에 본업에도 나름 충실하려 하고 쉬는 날 하루씩 다른 식당에 일을 나가는 부업에도 성실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주 갑자기 고모에게 연락이 왔더랬다. 작년 Lock Down 규제조치 중에 문득 생각이나 나 몇 년 만에 연락해보았는데 반갑게 맞아주어 스스로 반성도 많이 하고 가족들에게 더 신경 써야겠다고 다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심지어 고모는 매주 2-3회 투석을 받아 삶을 연명하는 고질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중에 코에 암세포가 발견되어 수술을 했다는 소식까지 전해 듣게 되어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안부를 묻는 문자가 날아와 반가운 마음에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을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덤덤하게 소식을 전하던 고모의 모습에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던 찰나 뼈에 전이가 왔고 현재 상황은 수술로 어찌할 수 없는 단계라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며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연락을 했다는 듯한 표현을 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자세한 상황을 물으며 4월에 한국에 들어갈 계획이 있는데 그때 얼굴 볼 수 있겠냐는 질문에 무던하게

'그럼 4월에 봐, 수고해'

라며 대답하던 고모의 말에 차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 들어가 있는 아내에게 바로 연락을 하고 10년 전 결혼식 때 딱 한 번 본 뒤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상대일 테지만 상황 설명을 하고 어찌어찌 병원을 알아내어 병문안을 부탁했다. 몇 번의 면회 요청 지연 끝에 지난주 토요일에 겨우 10분 남짓한 시간 면회를 할 수가 있었고 그 소식을 내게 전해주었다. 한창 바쁜 토요일 점심 장사를 겨우 마무리하고 급하게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나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고 차마 일어설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고모는 내게 4월에 보자고 했지만 실상은 그때까지 버틸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소견을 이미 받아 든 상태로 길어야 한 달 정도 시간이 남았다고 가족 및 친척들에게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재차 4월에 내가 갈 때까지 고모가 살 수 있을 것 같냐는 내 질문에 아내는 단호하게도 그럴 수 없을 것 같다고 어서 서둘러야 할 것 같다했다. 이미 말조차 어눌하게 하시는 상태인 데다가 이미 오랜 투석으로 인해 몸이 많이 약해진 상황이라 겨우 연명치료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수준이라는 적나라한 소식을 접하고 나니 어떻게든 빨리 한국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할 뿐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감정을 조금이라도 추스르고 주방으로 들어가 Head Chef에게 잠시 이야기하자며 밖으로 불러내는 내 모습에 이미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을 보며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냐고 먼저 묻는 말에 그만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감정이 격해지자 모국어도 아닌 영어가 자연스럽게 나올 리가 없었고 내가 생각해봐도 이해가 쉽지 않을 말로 상황을 알렸다. 사실 이미 3월에는 Head Chef가 휴가를 가기로 되어있었고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우기 때문에 그다음 직책에 있는 나와 또 한 명의 다른 Sous chef가 주방을 관리해야 하는 터라 몇 주전부터 우리 둘에게 업무가 집중적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내가 이 상황에 휴가를 가겠다고 하는 건 회사 측에서 받아들여지지 어려운 요구사항일 것이 뻔했지만 나로서는 방법이 없었기에 나보다 나이도 어린 Head Chef를 붙들고 이런 상황을 전달해야 했다. 당장 본인이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고 관리자 직급이 동시에 둘이나 주방을 비우는 건 쉽지 않을 거라면서 회사에 본인이 이야기해 볼 테니까 잠시 쉬다 오라며 시간을 주었다.

 그 와중에 고모에게 연락을 다시 해보니 여전히 덤덤한 투로

"니 아내 이쁘더라. 너 잘해야겠어"

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초연한 모습으로 대답을 했다. 이미 예전에 4월에 보기로 했던 약속은 잊었다는 듯 내년에는 한국에 들어올 계획이냐는 질문을 하길래 다시금 심상치 않은 상태인 게 실감이 났다. 당신 보러 곧 가겠노라는 내 대답에 본인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렇게 오지 말고 너 계획대로 하라는 말이 얼마나 가슴이 저리던지 지금 그 순간을 회상하며 글을 쓰는 순간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다.

 

 사실 고모와 나는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다. 막내 고모라서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서 어릴 적에는 자주 얼굴 보고 스스럼없이 지내던 사이였지만 아버지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서로가 멀어지고 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친가 친척들과는 연락이 끊기고 근 10여 년을 살았다. 그러다 결혼을 핑계로 다시 찾은 친가 친적들은 나를 다시금 반갑게 맞이해 주었지만 결혼 직 후 한국을 떠나 호주로 건너와 맨땅에서 시작해야 했던 또 다른 지난 10년이었기에 나도 그들과 자주 연락하기엔 내 마음에 여유가 너무도 없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와 이렇게 아무리 비통한 소식이지만 내가 흔들리게 될 줄은 몰랐다. 그만큼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 탓일까? 나이가 들 수록 핏줄이 땡긴다던 옛 격언(?)을 한 귀로 흘려듣던 그 혈기왕성하던 시절도 이제 저물어가고 이민자 생활을 하며 숱한 상처를 남긴 대인관계에 지쳐있던 탓인지 고모의 소식은 여전히 내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만큼의 큰 여파를 남겼다. 어쩌면 그동안 암묵적으로 스스로 등한시하고 있던 친척들과의 관계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 혼자만 생각하고 살아왔던 지난 시간에 대한 너무나 처절하리만치 냉정한 현실 결과에...


 당장 회사에서 결정이 어떻게 날 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빨리 가려고 비행기 표도 알아보고 나름 시간계획도 세워보고 야속한 해외 입국자 자가격리 규정도 들여다보며 휴무일을 보내고 있다. 순간순간 울컥울컥 하는 감정을 간신히 붙잡으면서 대상을 모르는 그 누군가에게 제발 내가 고모 생전에 얼굴을 볼 수 있기만을 빌고 있을 뿐이다. 너무도 간절한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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